이병용 시인의 시조집 『守靜詩詩抄』에 붙여/ 이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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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용 시인의 시조집 『守靜詩詩抄』에 붙여/ 이영지

수정(守靜)시의 춤
- 이병용 시집  『守靜詩詩抄』에 붙여

이 영 지
문학박사 · 철학박사 · 시조시인

1. 기행에서 얻는 수정(守靜)

한국의 전통시 장르 시조는 적어도 오천년을 이어왔다. 이러한 관계로 하여 한국만의 특유한 뿌리를 갖는 그 대표적인 것이 시조이다. 그 명맥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리를 이번 이병용 시인이 시조집 『守靜詩抄』가 자리를 차지, 상재하였다.
더구나 시조집 제목을 『守靜詩抄』라 하였다. 이 수정시초의 의미는 고요함을 지키기 위하여 시들을 모아 놓음이라 이해된다. 그만큼 이번 시집은 고요함을 중요시한다. 수정(守靜)이라면 노자 16장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을 떠올린다. 마음을 비우기를 극에 닫도록 하고 고요함이 돈독하도록 지켜내면 만물을 아우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도덕경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직 간택함을 버리는 경지까지 온 이병용 시인은 화려한 이력을 잠시 뒤로하고 기행을 통하여 얻어진 시조집 『守靜詩抄』를 상재하였다. 이 시조집의 가치는 시조 한편에 주로 종장에서 글자 하나하나를 형상화하면서 똑 같이 두 번 반복되는 연시조 형태이다. 이로써 21세기의 시조 형상화의 미학을 꿈꾸었다.
시조는 보여주기 문학이다. 형태면에서 그 리듬이 가히 세계적 이론을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본 필자가 본인의 연구서를 통해 밝힌 바 있듯이 이번 이 병용 시조집은 이에 그 첨단적인 이론의 현대시조 정립을 위해 사물에 대한 객관상관물을 의인법으로 형상화하는 회화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현대시조이론을 불러일으킬만한 시도를 하였다.
시의 특징은 dancing 문학이라 명명한 홍문표 박사님의 이론대로라면 시조의 dancing이론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준 이병용 박사님께 감사하면서 본 해설자는 앞으로서의 시조 연구 과제를 주기에 겸허히 이병용 시인의 이 시조집을 말하고자 한다. 
산문과는 달리 시가 가지는 특징은 춤의 형식이 시조에서도 적용된다. 더구나 이병용 박사의 시조는 의태시가 갖는 춤의 형식이 시조 한 편마다 반드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의인화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종장에서 아주 섬세하게 시어를 배치하고 초·중장은 그대로 한 점이다.
이병용박사 시인은 초·중장은 시행을 본 전통대로 유지함으로써 비상이미지를 처음서부터 끝까지 유지한 회화시다. 그런 다음 절제된 종장의 중요한 의미를 시어 글자들 모양을 비스듬히 놓거나 위치를 변형함으로써 글자수 마디는 변형하지 앟으면서도 그 의미를 혁신하는 시조 형식의 돌파구를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기행시는 시집에서 그 위치가 맨 뒤쪽으로 가기 마련인데 담양에서 건진 시들을 맨 처음 1부에 놓아 그 의미의 무게를 두고 있다. 다름 아닌 나그네 인생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원래 이 나그네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의미한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어 의미에서 찾아보면 기독교이론으로서의 전도 의미가 내재함을 본인은 밝힌바 있다. 한국에서 인구에 회자하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말이 무의미의 값어치가 아니라 사람의 중요성과 함께 시조작품을 통하여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전달자라는 정의가 된다.
1부에서 11편의 작품을 실었다. 이병용 시인은 이 11편의 11 숫자의미를 통해 마음비우기를 이미지화의 하는데 10편도 아니고 11편의 11 숫자 상징 즉 1자를 나란히 하여 두 개의 발로 바로 걷는 나그네임을 회화 화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전 편이 한 작품에 두 개의 나란한 의인화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나그네 인생은 홀로가 아니라 그 누군가와 같이 걸어야 하는 집단의식을 회화한다. 그 대상이 절대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서 이러한 관점은 이병용 시인이 지금 바로 선 이미지와 더불어 절대자가 바로 서게 한다는 신앙적인 점이 첨가되면서 나그네 인생도 살만한 인생임을 제시한다.
살만한 인생은 값어치가 있는 인생이다. 이를 시조 한편 한편마다 이 시인은 객관화 하였다. 이러한 이미지 도입은 시어배치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시조작품 제일 처음을 「정자에 누워」로 시작하면서 직립상태가 아니라 누워있는 현재를 던진다. 1부의 11편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십자의 형태를 지니면서 신앙적 해설을 요구한다.
이러한 객관성으로 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동적 기능은 직립 상태인데 「정자에 누워」는 시의 외연으로서의 정적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시가 가지는 은유와 비유와 그리고 상징을 함께 내포한다. 직립의 정 반으로 누워있는 것을 시집의 첫 작품의 시작으로 한 누워있는 「정자에 누워」자세는 가장 편안한 자세이며 제목이 주는 수정(守靜)이라는 고요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함을 제시한다. 

이병용 시인의 「정자에 누워」는 장자의 산목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이상의 시제 5호에서 보이는 절대의 피신처를 찾아 나선 이미지와 같다. 이병용 시인은 정자라는 집 안에 누워있다. 아니 이병용 시인은 그의 몸을 담양 정자에 누였다. 누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적으로 누인 것이다. 이 자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 시인은 자신의 강한 의지로 시조작품 「정자에 누워」시조작품을 지었다. 그 내용은 하늘의 그 광활한 곳에 자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다. 시조 문맥으로만 보면 정자에 누은 상태와 일치한다. 이러한 제목과 내용의 일치로 하는 시인의 의도적 심상은 이와는 정반이 되는 시적 형상화 즉 그림형태의 글자를 써야 하는 이유가 나변에 있게 한다. 
바로 이병용 시인의 눈이 하늘을 본다. 시는 보여주기 문학이다. 그런데 그 시선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본다. 그럼에도 하늘에 이병용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자아의식의 의미리듬이 되었다. 여기에 이 시집이 주는 시조 종장의 시어 위치필요성이 요구된다. 이병용 시인이 시 ‘정자에 누워’ 작품 시어 배열 위치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형태이다. 비행하는 비행기, 아니 날아가는 모든 새들의 모양이 된 두 날개와 두 다리가 힘껏 비상하는 언어 기호화로 하늘을 날고 있다. 이로써 이 병용 시인은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정자에 누인 고요한 마음의 날개를 달았다.

정자에 소자(小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흰 구름 세계지도 내 갈 곳 정해진다
방랑자
사지를 펴니
움쭉움쭉

 솟
  는
      다

네 발로 딱 버틴 정자마(馬)에 올랐어도
사방이 탁 트여 광야에 전가(全家) 없다
나 홀로
땅 끝 찾지만
하늘구석

 지
    없
        다
- 「정자에 누워」전문

  시인의 마음을 보여준 「정자에 누워」는 성공이다. 이제 비행은 시작되었다. 의식적으로 찾아간 담양기행은 절망하면서 인생이, 아니 이병용 시인이 산야에 숨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높이 비행하는 시인의 내면이 시조작품 종장 글자위치 의인화로 형상의 회화 시조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 하여 그림글자형상화의 성공이 시작된 것이다. 마음의 고요를 지켜야 하는, 사수해야 하는 이유는 이 시인의 비상에 있다.

방랑자
사지를 펴니
움쭉움쭉

 솟
  는
      다

사지를 펴니 움쭉움쭉 힘 솟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은 두 번의 리듬을 타는데 첫 번째는 “움쭉움쭉 힘솟는다”이고 두 번째는 “사지를 펴니”이다. 이에 시적 은유는 사지가 사지(四肢)와 사지(死地)의 모호성과 에매성이 주는 시적 특징을 살리면서 독자에게 상상을 맡기는 절대평가를 돌린다.
이 동적 이미지는 바로서거나 달리지 않으면서 정자에 누워 있는 유폐된 것과 다름없는 절망에서 시인이 건진 것은 시인이 결심한 이상을 펼칠 수 있다이다. 이러한 기호화의 리듬은 두 번의 같은 리듬을 타면서 그 반복성의 이유를 반복은 절망을 넘어서는 지름길임을 리듬화한다. 성경전제는 두 번의 리듬을 계속 하면서 그 분이 예수님임을 증명한다. 
반복리듬의 정의는 머무름이거나 혼자가 아니다. 바로 두 번의 리듬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리듬이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은 그야말로 필사적인 사수를 하고 있다. 이 두 번의 리듬을 이병용은 초장과 중장에서는 글자기호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초·중장이라는 두 번의의미를 극히 강조하는 비상의 날개를 제시한다. 동시에 종장에서 기호화의 리듬화한다. 시조집 전편에서 똑 같은 회화성이 절대 드러나지 않으면서 절망적인 내용일수록 이 비상은 오히려 시어의 기호화로 비상한다. 여기에 이 시인의 기호화 시조작품 가치가 있다. 
이러한 이 병용 시인의 기호화는 더 해설이 필요 없을 만큼 절대화된다. 시장에 나온 할머니의 푸성귀 파는 모습이 삶을 잔뜩 머리에 인 모습이지만 그리고 비틀거리는 모습임을 형상화하면서 오히려 리듬기호화의 형상은 한국여인상의 대표가 되는 씩씩하게 삶을 걸어가는 모습을 기호글자 화 하였다. 

하루의 좌판에 푸성귀가 시득시득
장보는 발걸음 한나절 맴맴 도니
할머니
주름위에로
 민

 팽
  이
걸어간다

솔솔한 흥정으로 동전이 짤랑거리고
술판에 길어진 입담 시간을 좀먹는다
주머니
지폐 깝살려
 집

 팽
  이
달아난다
- 「달팽이시장」

여인이 한 가정의 삶을 도맡아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시조작품을 휘청거리는 이미지로 비뚤하게 놓아 형상화하였다. 동일하게 ‘집’과 ‘민’ 글자가 옆으로 휘청거리면서 이 이미지를 내용과 형식의 동일리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이 그녀를 짓누를  수 없기에 어려운 삶을 잘 걸어가는 여인의 씩씩한 모습이 바로 머리에 무거운 것을 이고도 잘 걸어가고 있는 글자기호화로 종장 끝구를 일직선의 글자 나열로 한다. 글자도 ‘걸어간다’가 똑 같이 2회리듬을 이룬다. 이럼으로 하여 이병용 시인의 이미지기호화 시도는 성공하기 시작한다.
비록 다리가 접히고 꿈결중이어도 결코 정신만은 놓을 수 없는 의인법의 보여주기 시조이다. 그러기에 이 시인은 「몽한각」시를 통하여 머리에 날개를 달고 있는 그리고 엉거주춤 꿇어 엎드린 이 시인의 자아 각성을 보인다. 제목이 주는 마음의 고요로움을 지키기 위한 사수의 정진이다.

  이른 새벽 기차 타고 땅 끝 만큼 떠났기에
 부모님 생시언(生時言)이 무시로 가칫댄다
몽한각
 풍경에 뜨던
  청운의 뜻
    새
      롭
        다
 
  동창이 밝아도 개안(開眼)이 미력이니
 소년의 귀밑엔 흰머리 무성하다
귀거래
 뿌리는 씨앗
  다음 생에
    거
      둘
        까
          ?
-「몽한각(夢漢閣)」

이병용 시조작품의 특징은 어느 한 구절만을 이용할 수 없도록 철저히 기호와의 절대를 추구하여 전문이  요구된다. 그마큼 이병용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후반기의 집단각성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문학(聞學)이다. 대중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글자기호화시가 다를지라도 동일리듬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각성은 실제 기행의 삶에 있으면서도 더욱더 정신이 맑아짐을 시로 기호화하여 세속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속 속에서 고요를 찾아야 하는 지성을 대변한다.
그러기에「풍암정」에서는 풍광을 보면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몸은 풍광에 취하면서도 발은 앞서나가고 있다. 결코 정체가 아닌 앞으로 나아감이다. 그럼으로 하여 「무월(憮月)마을의 난생(卵生)신화」에서도 “알 깰 때/ 집 들썩해서” …“은빛 파란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기호화를 직립으로 하여 직립의 자아를 드러낸다. 이 시어는 ‘한 늘 님’ 이다. 이러한 유일한 심상이미지는 님을 향한 마음의 변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결코 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시를 지을 수 없는 서정시인 마음의 감성을 지닌 시인으로서의 삶이다. 님은 한용운을 비롯해서 우리나 전반에 흐르는 서정적 주자이다.
동시에 본인 자신도 되는 님은「죽녹원」시조를 통하여 대피리와 이 시인과를 동일시한다. 찾아낸 나의 모습이다. 쉬지 않고 불어 잎새를 춤추게 한다. 언어기호화의 절정은 산천초독이 춤추는 모습을 “산천(山川)… 초목(草木)악기”로 한다. 정작 시조 문귀는 “왜 쳐 댈 말 무얼까”?하고 묻지만 글자기호화를 통하여 마음의 청명을 그리고 대나무처럼 곧은 학자자신을 대신한다. 이번에는「식영정」시조에서도 수 백 년 된 적송소나무 용트림 위에 올라앉는 자신을 투영한다. 그리하여 도달한 곳은 물소리조차 없는 물이 있는「소쇄원」이다. 땅을 물이 흐르면서 소리조차 없다.
여기에 균형리듬이 있다. “높낮이, 좌우폭과 무관하게 등속(等速)이어서/ 막힘없이 흘러 낮추는 순한 물이 소리 없다”까지 왔다. 물의 소리 없음 경지의 고요로움 그것은 이 시인이 서두에서 본인의 말을 통하여 추구하는 인생 후반기의 목표이다. 모나지 않음까지 왔기에 시어의 기호화도 모나지 않고 있다.
 
2. 그리움 영역

제2부 연리지는 이미지의 시이다. 보여주기 시이다. 이 시인이 보여주는 그리움은 경험이 투영된 아련한 사랑의 즐거움을 낚는다. 오욕칠정의 감각적 경험에서 오는 촉각 이미지 간지럼의 경험이 갖는 행복감을 이병용 시인은 「목 백일홍」에서 몸의 감촉경험으로 절대화한다.
이 시인은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를 간지름으로 듣는다. 그러기 위해 시는 언학(言學)이 아니라 문학(聞學)으로 정립 화 하려한다. 바로 「목백일홍」이 소리내는 사랑의 음성을 듣는다. 그 간지러움의 달콤함 소리를 글자그림으로 두 개의 쌍으로 기호화하였다.

백일동안 뙤약볕에 달구어진 불덩어리
 풀무질 바람결에 열꽃들 흩어진다
  담금질
    눈에 아롱진
      새악시 볼
    붉
  었


뒤틀린 가지 사이로 뚫어보는 풍경들
 잎새들 그늘에는 간지럼이 와있다
  그림자
    색을 몰라서
      무심한 맘
    야
  속

- 「목백일홍」

마름모꼴의 두 기호화 시조작품을 통해 간지럼타는 그 황홀의 경지를 둘의 배가 쑤욱 들어가도록  웃는 소리의 문학(聞學) 이론으로 보여준다. 이병용 시인의 그리움 세계는 먼저 기행시초에서 보여주던 자아의식의 각성이 아니다. 웃음이다. 한들거림이다. 춤춤이다.
두 나무이지만 한 나무가 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소리 내는 향기를 듣고 있다. 그리운 이에게서 나는 향기를 듣는다. 그리움이 향기가 나는 것은 2부를 ‘연리지’로 하면서 들려준다. 이병용의 그리움 연리지 시학은 첫사랑의 매혹적인 유혹에 머무는 시인의 황홀함과, 신선함, 그리고 새로운 경험이 주는 그 신비의 소리를 듣는 경험 때문이다. 남녀 간의 첫사랑 경험뿐만이 아니라 가장 처음의 것, 처음으로 경험한 것에 대한 설레임이 수반된다. 바로 하늘로부터 받은 거대한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을 가진 것에 대한 황홀감을 가슴을 뒤로 팍 젖히고 엉덩이를 뒤로 내미는 시조 형상화이다. 바로 그것은 왕자와 공주와의 관계이다.

등빛 새는 유리창에 딱 달라붙은 야래자(夜來者)
꼭 이맘때면 기어 올라와 눈높이에 다다른다
  정수리
 씩은 땀 훔치며
큰 눈 뜨고
 살
    핀
      다

눈 맞자 멈춰 선 사지가 오므라들고
이목구비 들켜버려 박제 되어 굳었다
  아뿔싸
 개구리왕자
공주님을
 찾
    구

      나
          ?
- 「뭐꼬」

왕자는 왜 공주님을 찾을까. 왜들 서로 그리워하며 찾아오는 야래자(夜來者)!일까. 이 시조에서 그리움의 정의를 개구리 왕자와 공주님으로 한 해학성은 이병용 시인의 시조가 한국만의 전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명분이다. 한국문학의 주된 특징은 해학성이다. 풍자성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흥부가를 비롯한 긍정적인 웃음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발견하여 자기가 웃는 경지까지 가는 경이로움이다.
사랑이 그립다느니 외롭다느니 하는 보편적 시조 작품 대신에 밤마다 찾아오는 개구리 왕자라는 주인공의 시어의 신선함을 통하여 눈이 툭 불거진 즉, 그리움으로 눈이 튀어져 나온 개구리 형상화의 그림으로 하여 그리움의 해학성이 긍정적인 웃음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시조글자 위치가 눈 맞음과 이목구비의 보고 싶음에 눈이 날개를 달고 형상화된다. 왼쪽 갈빗뼈 위치가 쑤욱 들어간 형화를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갈빗뼈 하나를 이브에게 나누어 주어 짝을 만든 경지까지 가고 있다.
이러한 해학성은 시인 자신의 유한함을 긍정하고 유한한 것을 통해서 무한한 것을 얻으려 높은 차원에 와있다. 이러한 자신을 높이는 일은 남자, 특히 남성이 하나님 형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셋인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이병용 자신을 높임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준 시인의 소중함 때문이다.
너무 어둡거나 외로움 타령으로 일색 된 시조작품들의 기법을 이제는 현대에 맞게 옮겨야 하는 사수(死守)의 수정(守靜)이다. 고요로움을 지키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차원 높은 감성을 지닌 지성인의 고독이기 위한 시조문장의 기호화인 현대시조의 새로운 시작법이다. 기호화된 시조 작품 또한 그리움이 형상화되어 보고 싶음의 여성화자 공주의 글자가 앞으로 눈 위치까지 동일하게 형상화되었다. 해학성의 시조이다.
이병용 시인의 이번 시집은 전남 담양의 ‘글 낳는 집’과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에서 생활하면서 체득한 해학성이다. 사랑을 개구리 왕자와 공주님으로 객관화 하하면서 더 나아가 고요를 지키는 경지는 이제 해와 달과 별의 삼자의 우리 사이가 되었다. 원래는 너무 외로워서 하나님이 남자의 갈빗뼈를 뽑아 만든 아담과 이브, 그리고 왕자와 공주사이지만 담양기행과 부안문학을 통해서 진리를 인식하고 배워서 이끌어 사랑조차 다스릴 줄 아는 해와 달과 별을  셋의 우리사이로 하고 있다. 그만큼 동정 움직임 즉 기행에서 얻어진 수정시초이다.
공주는 별 그대이다.

별별별별 상상으로 그려왔던 그대의 초상
하늘과 땅에 미소만이 범접하는 자태로
별꼬리
 실을 남기고
  미궁으로
  사
  라
 진


점점점점 잇기만 해도 당신만이 떠올라서
해와 달로 세시 바꿔 태허자리 훑어본다
어둠 속
 우리 사이에
  눈빛만이
  스
  치 
 운   

-「별 그대」

그리움의 세계는 눈빛에서 일어나는 원동력을 가진다. 보고 싶음 그것이다. 보여주는 별 그대가 보고 싶은 것은 남자인 이병용의 기억을 기록해 줄 녹명 인자(錄名因子) 여자이어서이다. 바로 하늘을 반짝이게 해 주는 그대여서이다. 바로 이병용 시인을 반짝이게 해 줄 별 그대이어서이다. 이러하기에 늘 사랑하는 별에게로 눈이 간다.
왜 그대가 그리울까 나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갈빗대 ‘대신’으로 들어앉은 것이 복음이다.  여성이 그리운 것은 나를 알려줄 복음, 나를 전해주는 말 때문이다. 학자 브라트시오티스(Bratsiotis, N. P)가 복음이라 한 이 여성 Bratsiotis, N. P,“רשׂב,” TDOT Ⅱ, 317-332.,
이 이 시인에게는 별이 되고 그립고 보고싶고 한다. 나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의 씨를 낳고 죽어주는 그대와 알콩달콩 「홰치는 기도」수탉과 암탉이 되어 꼭이요 만나야 할 그리움이다. 이병용 시인에게 “곡이요”하면서 들려준다.
드디어는 시조작품「상사화」의 열정으로 꽂히는 글자모형을 직립으로 한다. 그러기에 시조작품 「연리지」작품에서 한 하늘을 이룬다. 정말로 한 쌍이 그리운 것을 성경은 그리움은 남자의 갈빗뼈를 뽑아 그의 여자를 만든 혈연관계로 한다.
바로 내가 그리운 것이다. 나를 찾기다. 고요를 찾기다. 그리고 이 고요를 지키기 위해서 시를 쓴다. 시를 모은다. 바로 이병용 시인의 시집 『守靜詩抄』이다.

3. 나를 찾아

이병용 시인은 나를 찾기 위해 숨은 그림 찾기부터 한다. 숨은 그림 찾기는 바로 시조가 지닌 은유가 된다. 뛰어 넘기이다. 시조 시인이 걸어온 길은 어려운 상황, 즉 시조의 사활화가 거론될 수 있는 전통시의 명맥 유지를 위해 시조시의 글자위치의 회화화를 시도하였다. ‘숨은 그림 찾기’의 가치는 이병용 시인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시조집을 기점으로 시조의 특성이 틀을 지키되 그 틀에 대한 새로운 완연한 시적 모티브를 형태주의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이상이 그의 시 「오감도」를 통하여 그 비밀한 시의 관문을 통과하였듯이 이병용 시인 역시 이번 시조집을 통하여 새로운 시조작품 현대의 틀을 보여주려 한다.
이병용은 이 시조집에서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형상화로 시조의 민속사적 경지의 입문서를 ‘짧은’ 지식이 아닌 ‘긴’ 삶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집단지성의 지식이 되어야만 한다 했다. 그러기에 이병용 시인은 시조의 혁신을 위해 사문(死文)을 버리고 긴 고통이 말하여 주려고 하는 숨은 그림 찾기에 과감히 나서고 있다.
이제 그 실행의 차례로 왜 그토록 가뭄이 계속되고 장마가 계속되고 큰 바위 얼굴이 되어야 하는 지를 시조 창작 작품을 통해 보이고 있다. 바로 시조작품 「마른장마」에서 소재를 지열을 삭힐 먹구름으로 한다. 비 올 징조의 ‘먹구름’ 시어로 그리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형상을 시조문장 기호화로 한다.「소낙비」에서는 메말라버린 감성에 비가 이 시인 몸을 적셔 줄 고마움으로 스며드는 형상의 기호화를 택한다.  「달집 태우기」에서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르는 마음을 형상화한다. 「오곡백과」에서는 모두에게 먹이기 위해서는 땡 볕이 하는 일을 알아야 하기에 벼이삭을 통해 의미를 고개 숙인 벼이삭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다. 이리하여 이 시인은 천지만물의 자연이치를 그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의 깊은 뜻을 헤아린다.
숨은 그림을 찾아낸 이병용 시인은 산 속 그 깊디  깊은 계곡과 울창한 삼림 속을 걷는다. 심호흡을 하고 큰 바위얼굴이 되어 간다. 진리는 결코 방황이 아니라 한 곳을 꿋꿋이 지키는 시조시인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그래서 오늘 이러한 기호화의 시조작품을 시도하며 걸어가는 발자국 모습을 시조시어로 점점이 놓아 형상화한다.

늘 보던 산 제자리에 빨딱 서 웅숭깊다
 내 발 바지런히 움직여 산 훑지만
  정중와(井中蛙)
  밖을 몰라서
    뛰어봐야
  산
  품
 이


골골마다 물 흐르고 심심(心心)마다 상념 깊다
 철따라 흥하여 풍경이 연이어 달려서 
  이생에
  보고픈 것들
    목을 걸면
  나
  타
 날

- 「숨은 그림 찾기」

시조 「숨은 그림찾기」를 통해 찾아낸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의 일 곧 100세 시대에 걸 맞는 집단 사유의 깃발을 든 기호화이다. 이 깃발을 들고 걷는 일이다. 깃발을 들고 보고 싶은 일을 귀로 들으며 보는 일이다. 방법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이제 이병용 시인에게 닥아 온 행운은 「먼동」이 트는 일이다. 

  파란 하늘 흰 구름 맑은 강에 떠 있고
 파란 강 흰 물고기 맑은 하늘에서 헤엄친다
  햇살이
  물에 풀려서

  채
    화
      가
        다채롭다

  흐린 하늘 회색 구름 황토 강에 흘러가고
 흐린 강 회색 물고기 먹장 하늘에 숨는다
  칠흑이
  먹칠을 해도

  발
    치
      서
        먼동 튼다
- 「먼동」

이병용 시인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침을 뱉는 ‘시인’이 아니라 침을 삼키는 ‘선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각오이다. 이병용 시인은 자신에게로 더 깊숙이 들어가 제4부 ‘시인의 섬어’에서 작품 이웃의 처절한 아픔이나 일상생활의 소소함에 이르기까지 감성을 집어넣는다. 「시인의 섬어」를 통해 ‘나의 이야기’는 구원을 향한 발 돋음임을 고백한다. 시조 「숨은 그림찾기」에서 찾았던 이 시인의 깃발을 이제 당당히 들고 걷는 형상이 기호화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꿈은 파란 하늘 뭉게구름으로 피어났고/ 내 삶은 푸른 호수 잔 파문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허파에/ 마지막 날숨” 소리 말꽃 피우리라“는 의지력으로 단호한 남은 생애를 걸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설」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인의 섬어는 지극히 바른 자세로 돌아왔음을 시조작품 글자로 형상화하면서 고요로움을 지킨다.
서두르지 아니하고 바른생활로 듣는 귀의 창작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감출수 없는 죄」와 「명랑대첩」에서 명랑대첩을 전해들은 귀로 바로서서를 시조작품으로 형상화한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이 보인다. 절대자가 숨겨두었던 형상을 보여면서 시인은 그분이 들려주는 은혜 앞에서 덴싱 즉 춤추기가 더욱 아름다워진다. 시인은 고요의 마음으로 춤춘다.
그래서 제5부 ‘벼춤’에서 절대자가 만든 자연물에 대한 경이와 이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이병용 시인의 세계가 펼쳐진다. 감동하여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는 이병용 시인은 언어를 춤으로 시각화하였다. 기쁨의 한 곳에서 덩실덩실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 시인은 글자그림으로 춤을 춘다.
고요로운 마음을 얻으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고 이 기분은 시가 고요로워 지면서 추는 춤이 꽃모양을 이룬다. 한 송이 꽃으로 시각화 된 「잎과 뿌리의 합창」에서 황금햇살의 은혜로 얻는 뿌리 깊음과 잎의 춤이 펼쳐 친다.「벼춤」에서는 황금이삭으로 변한 이 시인의 감격이 1부에서 전개되었던 각성의 깊이와 동일시된다. 자아를 찾은 고요의 평정이 모든 것을 깨닫고 난 뒤에 오는 고요로 조용히 그러나 황금벼이삭을 이고 서 춤을 춘다.

성하에 뫔으로 부대끼며 떨어대서
초록에서 황금빛으로 이삭이 팬다
 한가위
고개 구부린
 춤
  사
 위

 절정이다

* 뫔: 순 우리 모어인 몸과 맘(마음)을 합성한 조어.
- 「벼 춤」에서

이제 그 깊은 자연의 섭리로 돌아와 「신수렵시대」에 들어 고요를 지키며 같이 「방생」하며 어울린다. 이 어울림은 거의 온 원을 다 이루는 시각화로 한다. 원에 접근하는 「로드 킬」에서 고요를 지키는  어울림으로 「사막살이」인생을 살아가는 도구가 되었다.
흔히 인생은 고해라고 하는데 이병용 시인은 인생을 사막살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7부의 어두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조의 회화 화를 2회 리듬으로 하여 아름다운 리듬 놓기를 계속한다. 더욱이 「가을 하늘 새」에서 시인은 그 숨막힘의 세계를 다스리는 조용한 마음으로 고요에 머무른다. 사람의 생명을 주신 분이 있다는, 가깝게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내 몸이 그분의 귀한첫사랑을 받으며 자라  하늘을 우러르게 됨을 감사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아주 귀한 존재 이병용은「가을 하늘 새」시조를 통하여 선인이 되어 있다. 이 시인이 추구하는 리듬은 황금들판이 ‘굳건하다’의 표현으로 은유한다.
그 방법은 집단의식을 추구하는 시조작품의 희망을 힘으로 받쳐 들 수 없는 현실이지만 공굴리기식의 가벼움으로 머리에 인다. 이 방법으로 어울림과 그리고 귀를 열어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조물주가 들려주는 들녘의 황금들판 소리를 듣는다.

해눈 파란가슴 하늘새 날고 있다
갈바람에 쏠린 날개의 흰 깃털 가지런한데
 부리로
짖지 않아도
  핏
 빛
 단

곡(哭)한다

달눈 검은가슴 하늘새 졸고 있다
가을밤 여문 이슬 별들로 고개 들어도
 한 발도
달싹 않아서
  황
 금
 들

굳건하다
-「가을 하늘새」

황금들판이 들려주는 문학(聞學)은 굳건하다. 이 믿음에서 여유롭개 설봉호수를 돌며 여유로움을 만끽한다.

하늘에서 내린 빛이 백자의 무형(無形) 빚어
산그림자 호수 덮어도 순백이 도드라진다
    정화수
  고여 있어서
비는 맘이
        떠
          있
              다

백자에서 넘치는 맑은 물이 흐르는 호수
은은한 달빛 비춰 돌려주는 잔술인데
    잉어가
  입질을 해대
술이 익어
        취
          한
              다
- 「설봉호수」

이병용 시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사막살이의 삶에서 얻어진 눈물호수를 만든다. 눈물은 가장 순수하다.

사랑의 황금모래 뿔뿔이 흩어져도 쌓인다
사막강 흘러가 사막바다 펼쳐진 곳에
 눈 뜨고
  흘리는
      눈물
          오아시스
    섬 있다

죽음 건너는 낙타배에 사막파도 밀려닥쳐서
알알이 부서져 내리던 모래시계가 멎는다
 중력에
  딸려
    가버린
          무거운 것
    넋이다
-「사막살이」

그러기에 이 시인은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 있는 오아시시를 향하려 제 7부를 연다. 제7부 ‘수평선 너머’를 향하는 시인의 눈물에는 아픈 과거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이 고요롭게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병용 시인이 신앙시인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 곧 굳이 7부로 하여야 하는 이유와 눈물과의 연관성이다.
이 시인이 대중인식의 대변자로서 눈물을 씻어낼 절대자에 대한 신앙심을 가짐으로서 마음의 고요를 얻고 이로 하여 그 상징성으로서 신성수치인 보편적 진리의 7자를 회화시로서 구성한다. 이러한 7자 회화시조는 몇 번의 시도를 거쳐 뚜렷한 7자 구성을 하면서 눈물겨운 영원성에 대한 학자로서의 지성과 시조시인으로서의 감성을 합한 바램을 얻는다. 눈물이던 아픈 나라의 과거역사와 현실의 애국지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영웅적인면모로서의 눈물 흘림이다.  감성을 가진 시조시인이 걷는 길에서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가장 감성적인 시인의 모습이며 시조작품을 회화시로서 드러내고자 한 노력에서 얻어진 결과이다. 한국 전통시의 미래를 위한 미학을 여는 눈물이다. 이것만으로도 생애의 뚜렷한 목표가 되는 값어치가 있다.

  춥고 배고프지 않다면야 누구를 탓할까?
미몽(迷夢)에서 눈뜨면서 일상(一相)에 몸담지만
                                  존재의
                        울부짖음은
                  까닭모를
                집
              착
                뿐

  오로지 홀로서기 위한 부름이 아니었다면
사지(死地)가 미망(迷妄)으로 미수인생 가려내리라
                                  사철의
                        변화무쌍만
                  유전자에
                남
              을
                뿐
-「한해살이」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난처함이여!
녹산(綠山)이 동색이어도 햇살 따라 다채롭다
 하나님,
무지의 먹구름
  무지개로
    거
      두
          소
              서



내가 아는 참나를 용인하는 처량함이여!
백학 깃털 모두 뽑히어 드러난 몸 부끄럽다
 예수님,
속사람의 신성(新性)
  새부대에
    담
      으
          소
              서
-「회개」

아울러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역사와 현실성에서의 염원이 엮인 애국지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영웅적인면모를 드러난다. 시인으로서의 감성의 눈물이다. 
그리움의 무게는 이 시인의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치를 부여하는 공동의식의 그분을 향한다. 이로하여 혼자만의 고민과 슬픔과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같이 어우러져서 들으며 그 듣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자로의 하루살이를 살아가야할 자의 길이 열려진다. 열린 시조시학이다.
바로 거대한 진리에 대한 그리움에 동참하면서. 이 시인에게 가장 처음사랑을 주셨던 그분에게 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익혀 살찌우기 위해 시조의 기호화를 꿈꾸는 분에게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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