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랑시학

홈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시론, 수필, 감상평 등과 일상적 이야기, 유머, 질문, 답변, 제안 등 형식이나 주제,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하며 향후 이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우리사랑시학

◎ 이영지

우리사랑시학
 


우리 사이는 너와 나와 긴밀한 사이 일 때 우리 사이라 합니다. 더 나아가 너와 나와 그리고 그대가 합하여 우리 사이가 됩니다. 우리민족은 모두모두 이 우리라는 말을 좋아 합니다. 마음이 한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들이 힘을 합할 때 우리사이가 됩니다. 그만큼 단결을 전제로 한 사이는 우리사이입니다.
이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 엘로힘입니다. ‘엘은 힘을 가지고 있다 뜻입니다. 이 힘은 평화와 화목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사이일 때만 우리가 됩니다. 이 ‘우리’ 라는 말은 다른 나라에는 없습니다만 유일하게 연관 지을 수 있는 나라가 히브리민족이 사용한 원어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우선 ‘우리’라고 가장 많이 번역된 시편 137편은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입니다. 히브리노예들이 똘똘 뭉쳐 지난날의 자신들의 포로 기억을 떠 올리며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입니다. 노래는 입으로 부릅니다.
시편 137편에서 우리는 12번 반복합니다. 우리는 공통단체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가 한 강변도 아니고 여러 강변에서 모두 울었도다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주 울음에 박히어 우리는 늘 잊지 않고 보자고하며 하나님 위하여 우리가 켜놓아 폈던 수금을 이제는 켜지 않으려 버드나무에 걸어버렸습니다.
우리를 강제로 사로잡은 이가 우리에게 강제로 시켜  비틀려진 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강제로 우리에게 시온성의 노래를 하라 합니다. 우리에게 시킨 내용은 시온성아 훼파하라로 노래 부르라입니다.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노래 부르라입니다. 이 우리는 시편 137편에서 12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이 12회나 반복되는 첫구는 요셉을 기본형으로 하는 ‘우리가 앉아서’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세는 앉아서의 ‘야솨브누’입니다. 이 언어 끝을 보면 ‘누’가 있는데 이 ‘누’가 우리의미의 문법법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공동체들은 하나님 안에 단단히 잘 붙어 있는 ‘누’ 발음의 ‘우리’입니다.
노래 부르며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안기어 있어 하나님 집안에 앉아있는 자세입니다. 앉아 있는 이 고정적인 이미지의 ‘요새브누’ 발음은 요새 부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끌리어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의 연장선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있습니다. 아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자 요셉은 혼외 임신을 탓하지 아니하고 안전한 출산을 위해 멀리 예루살렘으로 까지 데려가 아기 예수를 낳도록 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은 자는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로 받고 이를 시로 찬양할 수 있어서입니다. 노래부를 수 있어서입니다. 전능자를 소망하는 사역으로서의 하나님의 일을 노래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로 있는 동안의 일 헛것인 우상, 생기가 없는 우상에 대하여 그들이 아무리 강권적으로 요구하더라도 히브리 노예들은 노래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벨론의 포로로서 노래부르라고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인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기를 넣을 때 힘줄과 살과 가죽으로 덮인 다음에 생기가 나 생명이 생기게 하셨고 죽은 자에게 생기가 들어가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의 아드님이 예수님이시기에 그 분이 아니고는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대화체 형식으로 된 ‘내가 네게’는 ‘파아나’의 파가 제시하는 입의 중요성입니다. 더 나아가 물고기 의미의 ‘나’는 영속 의미로 유월절 ‘페세흐’ 역시 입 으로 시작되는데서 이 입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입과 관련한 하나님의 명령에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로 말씀하십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입의 강력함은 우상숭배를 ‘너는 하지 말라‘보다 더 강한 ‘너는 할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의 이토록 강력한 강권력은 생명을 누리는 행복한 우리 생애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는데서 우리의 삶은 다른이와 구별됩니다. 이 오묘한 일의 히브리어 수치는 여호와의 수치26과 동일합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여호와 의미와 동일시됨으로서의 하나님의 절대명령  철자 수치17의 신성수와 아울러 절대영역이 됩니다. 
생명은 언어적 접근으로는 ‘예히’에서 야훼, 혹은 하나님의 옳은 손, 오른 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영역은 ‘예히’를 3회 반복리듬합니다. 강화이미지로 사람의 숨 쉼은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을 받는 자에 대힌 생명 모티브입니다. 진행형 ‘예히’는 우리가 절대복종 할 때 ‘예이’하는 발음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의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시는 데서 절대자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과 언약 하시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32회째까지 되다가 2장 1절에서 ‘일을 마치매’라와 더불어 33회째가 예수님 나이에 대한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일곱 번이나 맹세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표시는 그가 제시하는 신성수로 1계명이 10계명 중 첫째 계명이 아닌 10계명 전체 1계명임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을 은 서수개념이 아닌 하나의 뜻으로 하듯이 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바로 하나님 ‘나’의 명령이므로 생명을 주시는 자의 절대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사실 우상은 생기가 없고 뼈들에게 생기를 넣어 주지 못함으로 피리를 버드나무에 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옷니엘이 사사가 될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으며 기드온 · 입다 · 야하시엘 · 사울이 새 사람이 될 때 · 이사야에게 지혜와 총영의 신 여호와의 신이 나타났습니다. 이사야를 기름 부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며 죽은 자에게 살게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있게 하시어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였으며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실 때 기적이 일어남을 알기에 기타를 버드나무에 건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므로 사울이 예언할 수 있었고 사울의 사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문제는 물 건너 온 민족이라는데 발음 원어 ‘이브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쁘리’‘입으리’입니다. 히브리 원어로 ‘이브리’ 발음입니다. 글자 뜻으로는 눈으로 하나님 눈 안, 하나님 집안에 들게 되는 민족이 이브리 민족입니다. 
늘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이브리 민족입니다. 늘 이쁘리 하시면서 하나님이 늘 우리들을 늘 입으리라 고백하시는 민족이 이브리 민족입니다. 입으리 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 기억 속에 넣은, 이 안에 들길르 이브리 민족은 바라 하나님이 바라셨던 대로 바라신대로 되는 민족이 이브리민족입니다. 하나님 집 자신의 집 안에 있는 이브리민족을 ‘봐라 봐라’ 하시며 자랑하시었습니다. ‘보레 이거’ 하시면서 더욱 ‘보렜다’ 강압적으로 명령하시었습니다. ‘보레’ ‘우보레’ 까지 하시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들을 ‘입으리’하시면서 ‘이쁘리’하신 이브리 민족은 그 기억을 붙잡고 ‘우리가 울었도다’하며 시로 만들어 노래로 고백합니다. 시는 마음을 정화시켜 줍니다. 여기에 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박히누’라 늘 마음이 아팠던 지난날 일을  시로 짓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나를 사랑해주는 분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사와요
잠시 이별이에요 손을 놓사와요
어쩔 수 없다면서
이별이 서러워 손 놓고 발 놓고 앉아서
울음도 버드나무에 걸었사와요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이 울어요
수금이 버드나무에서 밤낮없이 울어요
울다가 지친 틈사이로 하늘소리가 들려요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버드나무 가지마다 들리는 소리를
수금이 켜 놓아요
바람에 일렁일 때 마다 울려 
우리도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자 말자
수금소리로 손을 내 밀어요
 
수금이 걸린 버드나무가 쑤욱쑤욱 
수금도 쑤욱쑤욱
우리도 쑤우욱
하늘가까이의 수금의 손을 잡은
쑤우욱 큰 버드나무 손을 잡은
버드나무에 걸린 우리들의 손을 잡은 하늘소리
우리소리 예루살렘성을 휘돌아 흐르와요

엄마 손을 꼭 잡은 아가처럼
로미오와 주레엣 사이처럼
오오 우리는
예루살렘성을 돌며 시온성의 노래를 불러요

환경이 어려울수록 이브리 노예들은 단결하여 입으로 노래 부르며  ‘우리’하며 ‘우리 우리....우리 우리’ 하며 ‘우리야’하며 우리는 서로 ‘우리 일어나라’합니다. 우리 셋이서 사람을 만들자 하시었으니 우리들도 가슴을 부풀어 우쭐하며 아나 우리하며 그리움을 신의 뜻으로 합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을 그리워합니다. 우리가 사랑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 무리인 우리는 소경입니다. 성경이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서 백성은 소경이미지입니다. 한글 창제의 표현을 보면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뜻을 나타내고자 하여도 일 때 이 어리석은 이 바로 앞을 보지 못해 구물구물 거리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구불구불하거나 구물구물하거나 모두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움직이는 모양은 물이 이동하는 모습입니다. 움직이는 모양은 살아 있는 표시입니다. 이 ‘물’자를 옆으로 놓아 읽으면 ‘말’이 됩니다. 법령입니다. 말씀입니다. 시인의 시가 됩니다. 히브리어는 어미형에 ‘임’을 사용하여 ‘임’이 됩니다. 움직이는 것들의 살아있는 모습이 임입니다. 구물구물 움직이며 살아있고자 시인은 움직이고픈 그리움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이를 시로 씁니다. 그리워합니다. 우리사랑을 시로 씁니다. 
물이 살아서 구물구물 거립니다. 말씀이 살아서 구물구물거립니다. 무엇을 그리워하며 계속 이동합니다. 물은 히브리어로 ‘맴’입니다. 이 글자에는 물이 두 개 있습니다. 앞의 물 모양은 이상시에서 ㅁ모양이 네모 모서리가 떨어져 있듯이  히브리어 ‘맴’도 네모 모서리가 떨어 져 있습니다. 이 물 안에 생명이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빛을 따라 사는 시인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시를 씁니다. 구물구물 움직이면서 빛을 따라 시를 씁니다. 세테와 헤르만과 카이저 학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물에 상상력을 배 두개에 두었습니다.
* 표 1:  물위의 배


*표 1:에서 보인 물은 배 밑에 있습니다. 아주 깊고  거대한 심해(深海)에서 까만 벌레에게 빛을 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물 위의 배에는 사람과 이상한 벌레와 여인이 몸으로 네모 모형이 있습니다. 위 그림의 물은 모두 위아래가 손과 연결됩니다. 곧 하나님의 손이 가운데 있습니다. 지중해 해안, 어느 작은 어선의 아기 전설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화면을 어둡게 하면 빛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의해서 비칩니다. 배 안에는 열 사람이 있습니다. 동시에 물 ‘마  임’ 가운데서 하나님의 옳은 손이 나와 10 사람에게 비칩니다.
그런데 벌레 양옆에 선 사람의 비율은 8: 2입니다. 따라서 8:2입니다. 벌레가 하늘 신*그리스도교와 관련된 Himmelsgöttin의 아내이고 잉태이야기까지 언급되는 이 자료는 헬데르의 이집트 미술의 그림 439 “빛이 어둠을 인도한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언어적 접근으로도 기본형 히브리어 ‘토레다’와 본문 토라이트와 ‘하토라이트’ 모두에서 벌레는 사람이미지임을 드러냅니다. ‘엘레 톨레도트’라 하여 낳다 의미인 ‘얄라드’에서 유래된 토라입니다. ‘도라’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법입니다.
구물구물하면서 앞을 잘못 보지만 그래서 구물구물 움직이지만 빛의 인도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엘레‘, 알라, 아이입니다. 동물사전에서 찾아진 벌레 토라아트’입니다. 돌아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사람은 8:2의 비율인 2 사람입니다.
한국 경상도 지방에서는 갓 낳은 아이를 ‘얼라’라 합니다.  Kikayon으로 앞을 잘 못 보는 근시의 벌레 같은 인간 얼라는 벌레 ‘하토라아트’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Ayyla입니다. 빛을 받은 뒤 출산의 의미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벌레’지만 시적 가치로서 1차적 의미를 벗어나서 사람이 되는 두 사람입니다.
사람은 큰 배 안에서 그래서 물결 위에 떠 있습니다. 비록 10사람이지만 두 사람만이 빛을 따라갑니다. 하나님 사랑 실천자입니다.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우리입니다.
‘마 임’의 물 두 개 물 ‘맴’과 물 ‘마’ 사이에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손이 주는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은 참 생명을 살아갑니다. 붙잡히어 살아갑니다.
물 말씀에 붙잡히어 살아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임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덤으로 더 영생의 물을 먹습니다. 벌레와 경솔성 의미까지는 우리들은 영생의 물을 먹으며 가족이 됩니다. 서로 의지하며 믿고파’하는 가족은 우리사랑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입을 맞추어 같은 말과 같은 뜻을 전하는 우리가족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한 지붕아래서 오랜 삶을 같이 살면 지혜가 탄생됩니다. 이것이 판결법입니다. 배를 내밀 수 있는 삶의 지혜는 끝말 ‘....다’로 결정되면서 우리가 도우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 법은 다름아닌 달을 주기로  하는 매 월삭 때 마다 한 지붕아래서 마음을 열어 번제를 드리는 법입니다. 이러한 방향이 정해지는 키보드를 가집니다. 배를 잘 저어길 수 있는 지혜는 빛을 따라 사는 법입니다. 비유를 가지고 시인인 우리들은 시를 짓습니다. 예수님도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의 법이 생깁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먹듯이 사람은 늘 말씀을 먹고 삽니다. 말 한마디의 시 한편으로 천 냥 빚을 갚으며 물이 오른 삶을 삽니다. 말이 물이 되고 물이 말이 되는 법으로 삽니다. 우리들은 정서적이어서 시적인 말을 합니다. 시적인 삶을 살면서 시를 씁니다. 달을 쳐다보며 달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아름다운 문학실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들은 정이 많아 사랑시를 씁니다. 우리사랑시를 씁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로 붙잡는 방법은 물이 하늘을 통한 법은 두 개의 U리듬입니다.
우리의 인생법은  하나님의 잔 안에 우리가 담기어 사는 인생법입니다. 바로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두 번의 U리듬법을 보는 일입니다. 처음을 그 하늘로 시작하고 역시 하늘로 끝납니다. ‘그 하늘’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끝납니다. ‘그 하늘’은 특정한 하늘이고 그냥 ‘하늘’은 순수 하늘입니다. 그럼으로써 커다란 두 개의 U리듬을 형성합니다. 왜일까요 특정한 그분의 은혜로 살다보면 인생을 순수하게 그리고 쉽게 사는 법입니다.
물의 흐름 그대로 따르는 일은 물 흐름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절대자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그대로 따르면 자연스럽게 순종의 아멘 생활이 옵니다. 사실 이 아멘은 ‘정말로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순종입니다. 다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멘입니다. 
그래서 ‘아멘 아멘’으로 답합니다. 아멘은 입으로 하는 찬송입니다. 한 번이 아닌 두 번의 아멘이 요구됩니다. 이 때 두 번은 성경에서 늘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이면서 두 번째 그리스도이기에 아멘 아멘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잘 섬길 수 있는가요 ‘어떻게’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입니다.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하여 내시는 아멘 아멘 하는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아멘 아멘 하며 사는 일입니다. 절망과 고통은 아무에게나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여 주시는 분에게 호소하는 법입니다.
‘어떻게’는 절대자는 다른 신에 비교할 수 없다입니다. 절대자에게 딸린 생명을 잇게 하여 주실 분은 누구오며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고백합니다. 절대자는 아모스에게 물을 책임지시는 자로 사랑을 첵임지는 자라 대답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징표는 피와 말씀이 연합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믿는 절대자의 사랑을 가슴에 넣는 사람입니다. 다윋과 예수님의 관계는 다윋의 자손 예수여라는 징표가 주어졌습습니다. 늘 어떻게 하면 좋으냐며 간절히 묻고 그 답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닮은 끓는 가슴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부터 50까지에서 형성되는 두 개의 U리듬을 형성하면서 하나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로 됨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한글이나 히브리어 원어 그대로 쉽다는 의미의 수비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면 살기가 아주 쉽다는 말입니다. 아주 시적입니다. 
왜 일까요. 물 ‘마 임’ 사이에 하나님의 옳은 손이 있어서입니다. 그 징표는 신성수로 합니다.  이 수치는 10이며 하나님의 오른 손이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기에 우리의 삶은 든든합니다. 부모에게 보호를 받아도 든든한 삶인데 지극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일은 마음이 아주 든든한 일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일은 아주 쉬워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품안에 안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만큼 순종을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아니함에는 사느냐와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는’ 일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둘씩 둘 씩 분깃을 얻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저녁이 된 다음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만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날에 서 있습니다. 저녁에서 아침이 되는 여섯째 날을 지나 일곱째 날에는 다시 일곱 번 돈 사람만이 살아 복을 누립니다.
일평생 그렇게 사는 일은 좋은 물을 먹으며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물을 내미시는 일입니다. 이 물을 얻는 사람은 받아먹기만 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물을 마시는 일은 말씀을 먹는 일입니다. 바로 완전한 목표 속에서 사는 우리는 흠 없는 이를 따라 흠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 분을 그리워하며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어 시를 씁니다. 우리 시랑시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사랑시학이 탄생합니다.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