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의태어를 중심한 시와 시조의 하이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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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의태어를 중심한 시와 시조의 하이퍼성

물의 의태어를 중심한
시와 시조의 하이퍼성



Ⅰ 서론

한국과 중국은 많은 문학적 교류가 있었다. 각기 한국문학과 중국문학은 각기 다른 언어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듯이 이들 언어는 전혀 다르다. 이 차이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원문을 통해 한글창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다름 아닌 우리의 나랏말이 중국과 완전히 다름을 제시한다.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맞는 한글을 쉽게 익혀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일상 말과 같은 한글은 오래된 한글 그대로의 소리글자를 한글로 만들었으므로 특히 의태어가 발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중국 언어의 변형, 속칭 한국의 선비 문화가 있다. 한국에는 한문숭상으로 인한 한국 내에 한문어 문화권이 있다. 그리고 한국에는 순수한 한국 언어권의 의태어가 발달되어 있다.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한국어의 어려움을 인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국문학과 중국문학에서의 상이성과 유사성 연구의 일환으로 시를 통한 물의 의태어를 임의 선정하여 시와 시조들을 살핌으로서 양국 간의 언어차이를 넘어선 물의 의태어의 하이퍼성을 연구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범위의 심도를 깊게 하기 위해 형식주의 비평방법으로 접근되는 시의 외연과 내포를 살피는 일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시가 보이는 문학기능은 시를 통한 희노애락 표현이 동일함을 살피는 일이다. 중국의 한산자나 황정견의 시, 그리고 조선시대의 이황시와 시조에서,현대시조시인 이영지 시조에서 연결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 한산자와 강서시파의 6군자 중에 하나인 황정견과 이조시대에 이황과 이영지시조는 시대적 배경이나 살아온 환경과는 관계없이 물의 언어를 통한 그  연결가능성이 있다.
이황이 주장한 철학은 일찍이 심경에 심취되었던 중국의 진덕수 주장의 주리설과 연결되어진다. 한국에서의 대 철학 배경이 중국 시와 연결되는 가장 기본적인 연결이유다. 율시와 시와 시조를 형식주의 비평과 바슐라르의 현상학적 적용으로 물의 상력 범위의 학설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물의 이미지를 4단계로 구분하는데 있다. 중국 선시는 양 무제 보통원년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601~674)에 이르면서 홍인의 제자 중 대통신수와 혜능 둘이 북종과 남종으로 나누어지면서 시단에 왕유, 이백, 두보 등이 출현한다. 언어 절제를 전제로 하는 선시승에 신수와 혜능이 있고 승찬의 「신심명」 잠언시 그리고 영가현각 선승의 「증도가」는 깨달음의 희열 장편시와 석두희천의「참동계」와 선시인 왕유의 선체험 시화가 있다. 두보와 이백이 연결되어지며 이백은 선에서 출발하여 도가 세계로 들어갔고, 두보는 비참한 현실을 시화하였다. 중당기에 차츰 생활시로로도 바뀌면서 전설적인 한산의 인생무상 산거선시인의 영향으로 한국의 백낙천, 유종원 등으로 번역역문체의 산문시형식이 유행한다. 송 시대 성리학은 게송 번역문체로 되면서 안녹산의 난을 다룬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까지 다루다 보니 불교진리가 일반속성화되어「장한가」까지 유행한다. 문학형태인 설화로 변형된다. 이러한 나열이유는 한국과 중국의 강서시파와의 관련은 서적의 유입으로 인한 출간문제가 되면서 중국 황정견은 이인로에게로  그리고『보한집』에서 좋은 시 방법이 전해진다. 이미 고려 중기 때부터 산곡집이 유통되어 공양왕대에 고려간 본 『산곡시집주』가 있고 황정견 중심의 시선집과 문집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안평대군은『8가시선』을 엮고 황정견 시를 가려 뽑아『산곡정수』를 엮었다.
이러한 행보등을 정상홍교수는『중국문학발전사』에서 송시 형성의 강서시파의 전수를 알리고 있다. 소식 영향으로 선종 황정견을 비롯, 장뢰, 진관 등의 소문4학사와 진사도, '6군자'의 왕성기가 남긴 일은 환골탈태의 기법 때문이다. 남의 글을 조금 다듬어서 훌륭한 글이 되도록 하는 이 기법은 음률이 바뀌는 모방론이다. 한국과 중국의 문학전수 관계는 조선의 이언적의 시조 예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은 주리설에 심취한 조선 이언적 시조이다.

천복지재니 만물의 부모ㅣ로다, 부생모육이니 이 나의 천지로다, 이 천지, 저 천지 즈음에 늙을 뉘를 모르리라
- 해동가요에서

조선시대에 시조형식을 빌어 쓴 이언적 시조는 진덕수의 주리설에 심취하면서 실제 한국과 중국과의 교류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서 진덕수 → 이언적 → 이황으로 이어지는 철학 교류는 이들이 지은 문학작품 특히 시와 시조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진덕수의 『심경』 정민정은 이언적 시조에 이어 이황의 시조 「청량산가」에서 보다 높은 물의 의태어를 중심한 연계성을 드디어 찾게 된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훤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 이황 「청량산 가」

청량산 12봉을 아는 이 나와 흰 갈매기
갈매기 떠들건가 못 믿을 복숭아 꽃
도화야  떠들지마라 어부마저 알거나
- 이황의 「청량산가」 이영지역

이 시조는 중국의 율시와는 다른 한국 고유의 전통시이다. 이황은 이언적 이후 대 철학자가 되면서시조시인으로 그 이름을 알린다. 이 연결은 시대를 뛰어넘어 이영지 현대시조로 이어진다. 이영지의 시와 시조 기법은 강서시파에서 서곤파와 강서시파 두 부류 중 서곤체의 화답시 형태에 연결되어 질 수 있다. 화답시형은 시조의 초장과 중장에서 그 형태상 음수율은 같지만 화답형식과 의미의 대립으로 쌍을 이루는 이론이다. 똑같은 음수율을 지니면서도 그 의미는 내포성으로서의 대립성이 된다.
시조의 전통성은 삶의 진지성을 주제로 한다. 한산자 · 황정견 · 조선의 이황시와 시조 · 그 가계인 이영지 현대시조에서의 아직도 그 맥은 이어지는 이 엄청난 일은 중국 진덕수의 심경에 심취한 이언적이 시조로 쓰고 다시 이황 퇴계로 이어지면서 현대 이영지 시조로 이어진다.

Ⅱ. 물의 의태어

1. 물의 의태어

1) 중국 선시와 물의 의태어

중국 선시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선의 법리를 전수하거나 설법하거나 입적할 때 선 경지를 읊은 시법시와 오랫동안 참선 뒤에의 깨달음의 개오시와 새로이 그 뜻을 밝혀 읊는 송고시와 선리를 바탕으로 한 선기시가 있다. 
시법시는 자기의 본래 심성에서 구할 것을 주장한다.         

어진 분 들 제 말 들어보소서  무엇을 가지려 하세요  깨우쳐 보시면  그 깨달음이 곧 부처에요  하늘 진리는 본래부터 있어서  얻었다 하면 곧 멀어져요  근본을 버리고 끝을 찾으려 하면  어리석게 한때를 지키는 것일 뿐
- 한산자 작, 필자 역   
이 시는 시인 한산자가 천태산의 나무와 바위에 써놓은 시를 국청사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진다. 하늘의 진리는 부처임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벗어나서 도를 닦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깨치고 나는 일이 부처라는 것이다. 
반면 개오시는 선승들이 시를 빌려 깨달음의 경지를 읊는 시다. 송고시는 당송 시대에 시문학이 흥성했던 전통 속에서 태어난 시로 선지를 드러낸다. 어록이나 공안, 고칙을 시의 형식으로 선을 우회적으로 알린다. 스스로 철저히 주체적으로 깨달아가도록 하는 시로 위산은 향엄에게 “내가 말한 것은 나의 견해일 뿐이다. 너의 안목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길, 이것이 생사를 해탈하는 깨달음의 길임을 말한다.
선기시는 한용운의 시와 시조가 대표적이다.  『님의 침묵』90편은 ‘님’의 정체를 선의 관점에서 번뇌가 곧 깨달음으로 중생과 아픔을 함께하는 일이다. 남녀의 사랑 관계로 말하면 진정한 사랑은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여야 승화된다. 1917년 겨울, 백담사 오세암에서 오도 체험으로 민족의 아픔을 담는 참선의 선사가 무아 삼매의 경지에서 순간적인 언어를 시로 만든다.

(1). 중국의 동산양개와 한산자
물에 비친 나를 보며 읊은 개오시를 동산양개는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로 오도송한다.

남에게서 찾으려 하지말아라
그건 아득하여 나하고는 너무나 멀다
나는 지금 혼자서 가고 있지만
곳곳에서 그것을 만나는
그가 지금의 바로 나지만
지금의 나는 그가 아니다
이걸 깨달아야만
여여한 진리가 하나가 되리라
- 동산양개 직지심경 240 「나는 그가 아니다」
이영지 역

사물 깨달음의 진행이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깨닫는 여러 가지의 계기를 지적한다. 갑이라는 소재로 하다가 을이라는 소재로 화법을 바꾸기도 하는 개오시는 즐거움이 들어 있다.

마음은 가을 달로
푸른 물 같아여라 맑고도 깨끗하여
어떠한 다른 것과 비교가 안되는
- 한산자 작, 이영지 역

자신의 심경을 맑고도 깨끗한 가을 달에 비유하며 푸른 물처럼이라 하여 푸른 시내와 맑은 샘과 떠오른 밝은 달 모두가 한산자의 벗임을 말하는 기쁨이 있다. 물을 대상으로 집착하지 않은 마음을 공으로 본 고요함이다. 더구나 실재의 물이 아닌 데서 출발한 이 마음의 물이 깨끗하다이다.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버린 마음의 고요함이 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생명수로 되는 마음의 경지는 마음의 고요함을 푸른 물로 한다. 
물에 대한 깨끗한 선입관념은 바슐라르 이론의 2단계이다. 물에 대한 깨끗하다는 마음의 변하지 않음은 산에서 발견되는 청정한 나무들 사이와 아름다운 하늘과 맑은 공기를 벗한 자연의 물이 있을 대이다. 이 물은 시인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아 모든 것이 물로 보이는 하이퍼성이다. 시인 눈빛이 푸른 물이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 시인들 모두 이러한 현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시는 깨끗함을 공으로 보려 한다. 실제로 물이 있던지 없던지 관계없이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해 버린 뒤에 나타나는 마음 고요함이 물이다. 시인마음 속이 물이 되어 실제 물이 흘러가듯이 덧없음도 같이 있다.

(2). 선종 황정견
북송시인 황정견 문집은 고려조에 수용되었고, 조선조에 이르러 『산곡시집』이 널리 읽혔다.   
당 시인 유우석의

  멀리서 바라보니 아아주 밝게 보인
  동정호 검푸르게 첩첩산 잘 둘어서
  마치도 흰 은쟁반에 푸른 고둥 받쳤듯
「망동정」- 이영지 역

「망동정」 황정견시는

비오는 가운데도 잘 들어난 산 모양이
아아주 아름답게 호수의 물결 위로
- 이영지 역

산 모양이 호수의 물결 위로 떠오르며 아름다운 자연 내부 깊숙이 물이 그 중심을 이룬다.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시의 의태어기법은 물의 깊이다. 짧은 시 몇 구절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물을 통하여 시가 가지는 절제의 리듬까지 겻 들이는 시의 황금비율이다. 

2). 물의 의태어에 대한 시와 시조

물과 관련하여 이황은 많은 일화 내지는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이황은 예안향약을 통해서 농민을 향한 향촌사회를 안정화시키려 하였다. 이황은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방법으로 일상의 물을 통하여 깊은 철학성이 있게 하였다. 그가 벼슬 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위한 일생을 살 결심을 한 이유도 고향 마을 물을 중심으로 한다.  그가 즐겨 부르던 자신의 이름, 마스코트는 물러날 퇴(退), 시내 계(溪)이다. 실제 안동 땅이름인 그의 호는 그가 말년에 '퇴계'에 거주하면서 호를 '퇴계'로 지은 일화를 가진다. 이황 보다는 이퇴계로 더 알려져 있다. '물러나는 시냇물, 물러가는 시내'이다. 퇴거계상(退居溪上)이라는 의미를 담는 물러나 시냇물 위에 거하는 그야말로 물 위에 사는 삶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시내 위에 집을 지어 물욕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바란 퇴계의 의지는 그 인생철학이다. 마음을 가다듬어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겠다이다. 히브리어에서도 물은 물이 아니라 말씀이다. 퇴계는 79번이나 관직에서 사임을 했었다. 왜 그토록 물 가까이 하려 하였을까? 물 가까이에서 사는 삶은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그만큼 물이 지닌 성격 곧 흘러가버리지만 언제나 맑은 물을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안정과 깨우침을 던져주기에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은 맑은 물을 찾아 오늘도 산으로 들로 나서  세속에 찌든 삶을 잠시나마 깨끗하게 하고자 한다. 깊은 철학은 늘 물 가까이, 말씀 가까이 있는 삶이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성이 있다. 혼자서 물욕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흘러가는 물처럼 비우고 그 안에 절대의 마음을 넣는 일이다. 이황스스로도 그의 삶을 수 없이 가다듬었을 것이다.

(1). 이언적과 이황
이언적과 이황 관계는 긴밀하다. 이언적의 처음 이름은 이적이다. 중종의 명으로 이언적이라 하였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자옥산에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며 주자학 도입 후 주희의 주리론을 정통으로 확립한다.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는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에 주희 주리론적 견해를 옹호한다. 이기론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한 이언적의 이우위설은 이황에게로 계승되면서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 역할을 한다. 태극의 개념의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다. 이언적의『구인록』(4권)은 유교경전으로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에 대한 것이다. 주희의『가례』가 이언적「일강십목소」와「진수팔규」에서 군주사회의 예학통치원리가 된다.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도정치 기본이념「일강십목소」는 일강령을 '임금의 마음씀'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법도의 엄숙과 국가근본의 배양과 그리고 조정기강의 정대 및 인재취사의 신중과 하늘도리에 순응하며 언로를 넓히고 사치욕심을 경계하며 군자의 길을 닦음으로써 일의 기미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한다.
이황은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로 사림의 성리설의 핵심인 주리설을 주장하며 퇴계학파를 형성한다. 이처럼 국경을 오간 문학과 문화의 교류는 이황과 이언적과 진덕수와 이들이 서로 긴밀하면서도 차이를 보인다.

(2). 진덕수와 이황
중국의 진덕수와 이황의 긴밀성은 이황 학문이 성리학의 정수가 되게 하였다. 이황의 문집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 내 주자학의 주류로, 그리고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지금도 관심사가 되고 이황의 철학은 독일로 까지 그 학설이 유지된다. 주리설에 근거한 내면 수양을 아주 중요시한다. 사실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진덕수의 「심경: 정민정』이론은 이황이 평생 이 주석을 통한 성리학자의 길을 가게 한다. 사람 마음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이「심경부주」에 심취한 이황은 주자학의 정수인 성리학 저술로 어린 기대승과 사단과 칠정과 관련 논쟁을 하면서도 자신의 의견과 수정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을 세운다. 황정견의 시적 기법과 일치하기도 하는 이황은 도덕성 회복과 향촌의 안정을 위한 예안향약을 제정하며 사림 육성 백운동서원을 통해 후학을 육성한다.
이황은 1550년 풍기군수로 내려와 백운동서원을 중앙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서원을 단지 제향하는 공간이 아닌 사림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 수양을 하는 공간으로 규정한다. 초기 서원이 중시했던 제향 기능을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황은 이를 계기로 서원보급운동에 주력하여 상당수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고 이른바 조선 서원의 전형 완성이 되게 하였다. 이황은 선조에게「성학십도」의 그림을 통한 성리학의 정수를 드리며 군주학인 성학을 제시한다. 선조가 유학에서 성인이라 말해지는 요순처럼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에서이다.

2. 마음을 다스리는 물의 의태어

퇴계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물로 표현하였다. 다음 시에서는 퇴계라 정한 이유를 물로 곧  시냇물 가에 사는 삶을 시로 읊는다.

안개가 프르르다
산 아래 땅을 사서
드맑은 냇물 곁에
옮기어 사노라네
사랑이 머무는 곳은
물과 바위
여기라

숨 쉬며
소나무와
대나무 숲에 살며
조용히 지내노라 철 따라 기뻐하며
한가한 가운데에도 향기만을 맡으며

싸리문 만들어서
먼 곳이 보이도록
마음을 두드리며
책상에 앉으면서
황무지
이곳을 이젠
푸르도록 바라봐

집 짓고 들어앉아 바위의 붉음 보고
시냇가 돋은 풀이 모두들 이름없고
모래톱 여울에서 새들은 푸르르고
산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움을 키워라
 - 이황 - 이영지 번역

벼슬을 뒤로 하고 물을 찾아온 이황은 시냇가의 외딴 집으로 옮겨가서 살았었다. 이 계거이흥 「溪居雜興」.
에서 보인 이황의 매지청하외 買地靑霞外.
의 청하 靑霞.
는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동쪽에 있는 자하봉이다.  퇴계는 이 자하봉 밑에 집을 지은 적이 있었다. 시어 ‘하’ 霞.
는 지금도 경상북도 영주군 부석면 이영지의 고향 부석면 소천리 낙하암 바위에 새겨놓은 낙하암 곧 하암(霞巖) 할아버지가 이곳에 왔다는 뜻의 낙하암 바위가 있다. 이 후손 23대손.
은 지금도 이곳에 살고 있다.
조상을 부르기를 하암(霞巖)할베라 부른다. 이 하암의 하(霞) 雲陶正音註解.
 유래는 아랫것을 들어서 위에 보태는 곧 아랫사람들이 윗어른을 봉양하는 일과 윗것을 들어서 아래에 보태면서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부탁이다. 학문을 하는 데는 날로 더 배워야 하고 도를 닦는 데는 날로 욕심을 덜어야 益.
 한다.
시냇가 여기에 사니 들리는 음악소리 溪生聽韶咸.
가 들리어 매일 물소리와 더불어 사는 삶의 즐거움이 있다. 순임금 시대의 백성들의 삶은 음악소리가 났다. 그러므로 즐거움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는 직설적으로는 나라 정치를 잘 하면 백성들이 즐거웁고 시적 숨은 뜻으로는 시냇가에 사는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는 늦은 식사가 얼마만큼 나쁜가를, 그리고 물을 가까이해서 사는 생활이  얼마나 삶을 신선하게 함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햇나물 푸욱 삶아서 향기 나서 먹는다는 그리고 문드러지게 삶아 먹는다 하며 아아아 무엇하려고 늦은 요기 기댈까 하수대만찬(何須待晩饞).
라고 한다. 늦게 먹는 음식이 나쁨으로 시를 썼지만 채식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 다른 고기반찬이 필요하지 않다한다. 이러한 시적 내포는 맑은 물가에 살면서 얻어지는 삶의 즐거움이 바로 퇴계가 퇴거한 이유이다. 바로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줄 아는 의미소로 그 근원을 순응의 삶이 라는 커다란 차원을 지시한다. 각박한 오늘의 현실에서 이 시를 음미하여도 자연을 찾아 사는 생활의 지혜는 건강은 물론이려니와 마음의 건강을 가져오는 비결을 전해준다. 
 
1). 산에서 물 찾기의 물에 대한 의태어 시 

(1). 66봉과 물 
이황은 그의 고향 마을의 산인 청량산을 늘 오르내리었다. 그러면서 그 주위의 청량산을 시조로 지었다.
다음은 이황 퇴계의 시조이다.

청량산 육육봉 六六峰.
을 아는 이 나와 백구 白鷗.
 
백구야 훤사 喧辭.
하랴 못 믿을 손 도화 桃花.
로다
도화야 떨어지지 마라 어주자 魚舟子.
 알까 하노라
- 이황 퇴계 「청량산가」

청량산 12봉을 아는이 나와 갈메기
갈매기 떠들건가 못 믿을 건 복숭아꽃
복사꽃 너 떠들지마라 어부알가 두렵다.
- 이황 퇴계 「청량산가」 이영지 역

낙동강 휘감아 도는 경북 봉화의 청량산은 암벽이 불쑥불쑥 솟은 바위산으로 구성되면서 웅장하지도 높지도 않지만 연이어 솟은 바위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잘 어울려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린다.
청량사를 중심으로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를 합하면 36개의 봉우리이지만 특히 육육봉이라하여 시적 의미소를 강하게 한다. 66봉이란 이름은 주세붕이 붙인 이름이다. 봉우리들은 꽃잎이 돼 청량산을 꽃술 삼아 한데 감싸 안은 꽃 형상으로 되어 있는 절경의 산이다. 퇴계가 이 청량산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시조를 지었다. 이황은「청량산가」라 이름을 붙이었다. ‘육육봉’을 복숭아꽃에 비유한다. 복숭아꽃이 물에 떨어지면서 물 위에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는 시조이다. 물과 산과의 조화를 이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면 복숭아꽃 모양이 되는데 물이라는 시어가 한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복숭아꽃과 흰 갈매기가 있다고 시를 썼다. 
66봉봉우리가 복숭아 모양이 되어 있다. 이 시의 외연은 복숭아꽃이 물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인데 사실은 물과는 상관없는 상상력의 시조이다.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세계를 그가 만들고자 하는 의지력의 하이퍼성시다. 곧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시조로 하여 된 가상현실이다. 물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에 혹여 이 꽃들이 물에 떨어지면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더 나아가 이 아름다운 세계를 속세의 뭇 사람들이 알고 어지러히 드나들까도 두려워한다. 시조 한 수에 이처럼 많은 의미를 지니면서 바로 백구의 비상과 복숭아꽃 떨어짐의 아름다움을 떠들 어부도 염려한다. 고도의 은유적 의태어의 극치이다.

(2). 물 의태어의 하이퍼성
 
시대를 뛰어넘은 물을 통한 하이퍼 시는 사실 물 그대로이지만 이황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비추는 물이다. 퇴계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물을 가까이 한 삶이다. 단순한 일생의 한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79회나 반복하는 이황의 물에 대한 시적 표현은 고향의 물을 찾겠다는 의지의 삶이 의미화 된 것이다. 물은 일차적으로는 순리의 하이퍼성을 지닌다. 순리를 역행하는 일은 역사를 거스리는 일이라는 퇴계철학은 물 특히 시와 시조로 그 삶을 대변한다. 깊은 자연 속에 있는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 서울대학교, 2001), 175
 물을 찾은 이황이다.
청량산의 육육봉(六六峰) 이름은 주제와 소재이다. 말의 절제를 나타내면서도 중국의 율시가 아닌 시조로 하여 한국고유의 독립성을 보인다. 원래는 청량산 봉우리 이름들이 불교적 이름들이 많았지만 이를 불식시키는 ‘66봉’ 시어를 고친 주세붕에 호응하면서 그 의미를 철학화 한다. 12봉우리를 66봉이라 하였다.
매년 춘분과 추분에 경일봉에서 바라보면 해가 한가운데 뜨는 ① 경일봉이 있다.

경일봉 위로 해 솟으니 선계가 분명한데
66그 봉우리 뚜렷이도 솟아있네
세찬바람 몰아닥쳐 낙엽들 소용돌이치니
수줍은 듯 첫 눈은 당황하며 놀라는가
경일봉 햇살 이 가슴에 가득담고 나니
어찌 도 무얼 구하고 바라겠는가
- 록담 류호선

② 3층탑과 같다하여 붙여진 금탑봉과 ③신비로운 새가 춤추는 모양 같아서 붙여진 자란봉 ④ 동쪽 끝이 높이 보이는 봉오리의 탁립봉 ⑤ 푸른 바위가 천길이나 높이 솟았다 하여 자소봉 ⑥ 붓모양봉우리 탁필봉 ⑦ 정상에서 천 여리를 바라볼 수 있고 10여명이 앉을수 있는 연적봉 ⑧ 연꽃모양 같다하여 연화봉이라고 한 것을 주세붕이 고친 의상봉 ⑨ 돌봉우리로 향로모양 향로봉 ⑩ 중국의 오악중의 하나인 남악형산을 본 딴 축융봉 ⑪ 청량산의 주봉 장인봉 ⑫ 학의 집이 있다하여 주세붕이 붙인 선학봉의 66봉이 있다. 
시조를 평하여 음풍농월이라 비웃기도 하지만 이는 시가 가지는 고도의 은유기법을 모르는 소리다. 왜냐하면 이 음풍농월 속에 깊은 철학이 숨어 있어서이다. 이황의 시조 「청량산가」는 산, 그것도 작은 산이 아니라 아주 큰 산, 청량산을 물 위에 뜬 복숭아꽃으로 하였다. 물위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복숭아 꽃잎의 아름다움은 일찍이 한국인이 즐겨 먹는 천도복숭아에 비교되어 있다. 그만큼 맛이 있는 복숭아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의 산을 꽃잎으로 표현한 이황의 시심은 미래지향적인 하늘나라에 대한 꿈을 실었다. 평생 그가 주장한 경사상이 이를 바탕으로 한다. 아름다움은 물 위에 있어야하며 물과 산과의 조화를 아주 높은 하늘에서 보아야 보인다는 이황의 마음은 그만큼 높이 있어야 보이는 경지가 된 시인의 높음이다. 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흰 갈매기를 오버렙한 상상력 시조다.
물에 떨어진 복숭아꽃은 바슐라르의 역동적 상상력의 4단계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의 존재는 그만큼 귀한 존재라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이 철학은 부모를 잘 섬기고 이웃을 잘 받드는 경사상을 대표한 시이다.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이다.
시인 곧 문학인이 시어 하나로, 그리고 시 한편으로 그의 삶이나 철학을 대변하는 일은 그 시인, 혹은 문학인을 위대하게 한다. 그 예로는 셰익스피어다. 특히 한국인일 경우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뜻에 합당하게 하려는 마음이 표출된 이 「청량산가」의 육육봉은 리듬감을 살린다. 주세붕이 불교이름이 많은 봉우리 이름을 더 민속적이게 고친 점에 부응하여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문학화한 퇴계의 청량산가는 한국 특유의 시조로 하여 물의 의태어를 극대화하고 철학과 문학과 일생의 이념을 동일어로 묶는다. 한국정신의 기개와 그리고 깨끗함을 즐겨하는 선비정신과 맑고 푸르고 높음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절개이다. 
당시 한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바위모양을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은 한국인의 우리 것을 좋아하는, 찾는 정신이다. 애써 우리 것을 찾으려는 애국 마음이다. 그런데 66봉 외에서 자소봉의 중층, 만월대 앞에 있는 작은 돌 봉오리들을 옥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66봉으로 만으로 청량산을 대표로 한다. 시제목이 청량산가이다. 계곡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할 정도의 산세 급경사를 이루는 산 봉우리의 집합체를 육육봉이라 하며「청량산가」시조로 한다.


Ⅲ. 시조에서 물을 통한 의태어의 하이퍼성

1. 황진이 시조와 이영지 시조의 물 의태어 

1) 황진이 시조의 물 의태어 하이퍼성 이황의 시기에는 황진이작품도 있었다.
황진이 시조의 대표적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진본 청구영언』 286, 황진이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 시조는 청산 속에 있는 폭포수를 의인법으로 하여 실제적인 벽계수와의 사랑이야기를 달로 전해준다. 생명을 잉태하는 물의 향기는 달 속에 있다. 그녀의 달 속에 들어가 상대방이 쉬어가기를 원하는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달 향기이미지로 하였다. 황진이 시조는 물의 정서를 그리움으로 한다. 물의 생명력, 곧 물오름으로 사랑하는 원리를 알리려 한다. 이 아름다운 시조는 초장과 중장의 대립성으로 문학기법을 제시한다. 그리고는 종장에서 초장과 중장을 합한 회복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명력은 살아있는 존재의 중요성을 의미하는데 시의 숨은 뜻으로 하여 물이 표면화되지 않더라도 사랑의 힘을 전한다.

2) 이영지 시조의 물 의태어 하이퍼성

한밤중 날 부르듯 한 길이 수를 놓아
당신이 훈풍 되듯 명월로 걸어놓아
여인의 햇빛으로 서
바람, 청명
수놓아
-  이영지 「수: 새벽기도・67」 이영지, 『행복의 순위』 (서울: 양문각, 1989), 91.


낭자의 꽃신으로
모란의 웃은죄로
남자의 혼불이 눈뜨고 누워있네
진이의 초례마당에 꽃신으로 타다가

꽃 혼에 꽃 불로다
여인의 치맛자락
새색시 다홍치마 다홍상여 너무붉어
진이의 꽃신 데리고 꽃 혼타고 나는 날

꽃송이
마디마다
꽃 덤불
푸느라고
둥 둥 둥
못 보다니
진이의 의 다홍상여
꽃 무덤 치마폭 한수 꽃상여가 나는 날

                    -  이영지 「꽃상여」 전문 Ibid, 40.


황진이 시조와 이영지 시조와의 관계는 이영지가 황진이에 관한 시조를 지은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진이의 초례마당에 꽃신으로 타다가”, “진이의 꽃신 데리고 꽃 혼타고 나는 날”, “진이의 다홍상여 / 꽃 무덤 치마폭 한 수 꽃상여가 나는 날”과 같은 운명적 진술을 통하여 시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한 혼으로 만나고 있음을 확인 이병용, “사랑의 반복” 『행복의 순위』(서울: 양문각, 1997), 40.
된다. 왜냐하면 두 시인의 시적 묘사가 17세기 영국의 종교적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수사적 장점을 많이 따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시대를 달리하는 여인 둘이 시적 상상력의 근간이 되는 여성적 삶의 절제된 긴장이 주는 전통미가 또한 흡사하기 때문이다.
문학, 특히 시조에서 사랑의 의미는 늘 숨어 있는 속뜻 곧 내포이다. 이 때 사랑은 물의 의미로 대변된다. 살아있다는 의미의 함축이다.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 물이다. 사랑의 힘조차 물이 없으면 그 의미가 무의미하게 된다. 신이 부여한 힘이며 문학, 특히 시조의 절제성 속에 자리 잡는다. 사람은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사랑으로 결혼을 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낳고 사랑으로 전 생의 삶을 보람으로 느끼며 산다. 이 원동력은 늘 시 속에서 살아 숨어 있으면서 시의 내포가 된다. 그리고 늘 그 모습을 감추면서 물의 의태어로 살짝 옷을 입는다.
이황 퇴계는 형을 만나기 위해 죽령경계선을 중심으로 만났다. 그 때 만나 지은 시가 전해진다. 이황 퇴계는 죽령 옛길에 한시로 「촉령대」와 「소혼교」를 세워놓았다.

영영한 물소리 정 넘쳐 흘러나네
우뚝 선 봉우리는 이별한 쌓은듯이
소혼교 안영협 골짜기 우리 둘이 나눈 정
– 이황 「소혼교」 이영지 역

형님을 염려하여 부디 근무 잘 하시라
촉대를 만들어서 우리형님 충청감사
행차에 대 만들어서 보내노라 형에게
 - 이황 「촉령대」 이영지 역

온계와 퇴계 형제는 소혼교 다리 자리 곧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갈라서며 온계는 충청도로, 퇴계는 풍기군수로 공무를 보기 위해 서로 헤어지고, 또 만났음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시조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3대목과 연결 지어지는 한국 고유의 문학 장르이다. 따라서 그 전통성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며 특히 조선시대의 살았던 이황의 가계 잇기에서 발견되어지는 귀중한 시조의 전통성은 물의 의태어의 하이퍼성으로 발견되어지는 삶의 끈질긴 맥이 살아 숨쉬는 현장이 된다.
퇴계가 청량산 66봉이 실제 12봉우리의 이 12는 신화소로 굳이 12봉우리라 한 12에 대한 하이퍼시의 현실성은 이영지 교수의 『물의 신학과 문학』 이영지, 『물의 신학과 문학』 (서울: 영예문학, 2013), 51, 86, 123.~
 논문에서 12 숫자가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하여 일 년 열두 달, 물건 12개 묶음, 김지향시와 홍문표시, 그리고 이상시에서에서의 시어의 의태성으로 연구 이영지, 「하이퍼시의 현실성」 조선문학 2010년 10월호 (서울: 조선문하학사, 2010), 10월호.
하였다. 이 12 수는 신성수로서 전 세계적인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하이퍼성이다. 성경에서도 12제자와 이 열두제자 중 가롯 유다가 배반하자 그를 제명하고 한 사람을 더 세워 12제자로 삼는다. 12수를 채운 것이다.

Ⅳ. 선시와 기독교시의 상이성과 유사성에 대한 비교

1. 선시와 기독교시

문학에서 최대의 가치는 정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시를 쓰는 시인이 가진 사랑이다. 이 정서는 기독교의 최대 교리이다. 사랑은 기독교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이는 그 어떠한 종교와도 차별성을 갖는 진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어떠한 다른 반론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사랑표시이다. 이와 같은 일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로도 그 설명이 된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문학, 특히 시에서 이 진실은 그 주제가 되면서 시의 겉모양으로는 다양하게 특히 물의 의태어로 나타난다.
그 몫은 시인의 몫이며 시의 역량에 따라 그 진가를 발휘한다.

(1). 한산자시와 이영지 시조
선시인들은 선적인 분위기의 선취시와 산사의 풍경을 읊은 선적시를 쓴다. 성경에서는 다수의 성경원문이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시인들은 구원의 문제와 감사와 사랑 정지용 윤동주 김현승 김지향 추영수 안초혜 홍문표 이영지 등.
을 읊는다. 중국의 한산자 한산자가 이룬 以禪入詩 도입시초는 왕유에 이르면서 선적인 마음의 경치를 살린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선시는 禪詩는 시인들에 의해 '以詩寓禪(이시우선)'하였던 선승과 구별된 '以禪入詩(이선입시)'의 경지를 이룬다. 


는 당시에 유행했던 남종선과 북종선을 함께 수용한 시에서 물가를 묘사, 곧 의태어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불교적 관점에서 하이퍼시로 한다. 

한산의 길 오르니
한산의 길 끝이 없네
긴 계곡엔 돌무더기 쌓여 있고
넓은 시냇가엔 풀이 무성하구나
비 오지 않았는데도 이끼 미끄럽고
바람 없어도 소나무 절로 우는구나
누가 속세의 티끌 벗어나
흰구름 가운데 같이 앉아 보리요?
- 한산자 登陟寒山道(등척한산도) 한산의 길 오르니
寒山路不窮(한산로불궁) 한산의 길 끝이 없네
谿長石磊磊(계장석뢰뢰) 긴 계곡엔 돌무더기 쌓여 있고
澗闊草夢夢(간활초몽몽) 넓은 시냇가엔 풀이 무성하구나
苔滑非關雨(태골비관우) 비 오지 않았는데도 이끼 미끄럽고
松鳴不假風(송명불가풍) 바람 없어도 소나무 절로 우는구나
誰能超世累(수능초세루) 누가 속세의 티끌 벗어나
共坐白雲中(공좌백운중) 흰구름 가운데 같이 앉아 보리요?
, 이영지 역

한산자의 오언율시는 한산 아래 계곡을 따라 수풀을 지나 흰 구름 가운데 이르는 공간적인 진행과정을 묘사한다. 제3연에서 한산도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끼 미끄럽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나무 절로 소리 내어 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이 시에서 물이 은유되어 있다. 왜냐하면 소나무나 풀은 물이 있음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은 생명을 주는 원천수이기에 시에서, ‘푸르게’로 표시된다. 동시에 생명이 살아있음 또한 ‘푸르르게’로 표시된다. 시어의 의태어는 성경언어 히브리어로도 푸르게이다. 한국말의 ‘푸르게’라는 말이다. 히브리어와 한국어가 같은 푸르게 되는 현상은 물이 있는 강이 있어서 푸르게이다. ‘프르게’라는 한산자의 시에서 보이는 의태어는 물이 주위의 풀이나 심은 나무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생명의 언어이다.
이영지의 시조에서는 ‘푸르게’가 더 짙은 ‘짙푸르름’으로 물이 의태어화 된다.

물로만
둘러리 선
궁전에
집을 짓고

처음은
짙푸르게
바다의
푸른 벽을

백합에
엮기만 했지
물기둥의

박이
- 이영지 「백합조개」에서 이영지, 『행복코를 맞대고 사랑우산을 쓰면』전자시집 (서울: 문학방송, 2008), 10.
 

가만히
등을 안아
하늘을 잠재우는
시냇가
물안개가 하얗게 올라간다
물에서 피는 꽃이라
수은등을 달았다
- 이영지 「넌 나의 하얀 운명」에서 이영지, 『행복의 물을 먹으며, 사랑으로』(서울: 영예문학, 2008), 55.
 

하늘을 달래기까지 하는 물의 의태어는 푸르름에서 하얀 꽃으로 의태화 한다. 물 위로 오르면서 움직이지 않는 수은등을 하나 단다. 바람을 잠재우는 푸르름이 물의 의미를 넘어서서 마음의 푸르름이 다. 시에서의 시인의 깨끗한 마음은 기독교적 시인의 마음이다. 초현실적 절대세계에 대한 의미는 한산자와 비교하여 시냇가나 강은 한산자나 중국의 일반 시들이 가지는 선적 경지와 비교된다.
문학에서 논의되는 선시 禪宗(선종)은 양 무제 普通元年(보통원년;520) 달마라는 인도 수행자가 바다를 건너 중국 광주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달마로 시작된 선은 제2조 慧可(혜가)→제3조 僧璨(승찬)→제4조 道信(도신)을 거쳐 제5조 弘忍(홍인)에 이르러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성당 때 홍인의 두 명의 제자, 즉 혜능과 신수로 하여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뉘어 급속도로 발전한다.
와 기독교 시의 구분은 선시가 ‘선'과 '시'로 구분되듯이 기독교 시 또한 문학에서 시와 기독교로 구분된다. 분명히 중국의 두송백도 시와 선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하였다. 마음의 정서를 표출하는 물을 통한 의태어에서 선시는 깨달음을, 기독교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이 다르다. 자의적인 점과 타의적인 그 비중이 달라진다.

(2). 선시와 시조, 그리고 기독교 시조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시집 50권을 조사  이영지, “현대시에 나타난 이미져리 연구,” 『이응호 박사 회가 논문집』 (서울:  이응호회갑 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 1987).
한 바  조운은 선 시조 시인이다. 조운 시조는 물 이미지를 시조 「구룡폭포」에서 ‘물 ・ 샘 ・ 강 ・ 바다 ・ 옥류 ・ 진주 담 ・ 구름 ・ 눈 ・ 서리 ・ 새벽안개 ・ 이슬 ・ 구슬구슬 ・ 팔담 ・ 구룡연’으로 14회 Ibid.
 사용한한다. 물의 의태어는 1차적 의미에서 2차적 의미로 이동하는 은유 홍문표, 『시 창작 원리』(서울: 창조문학사, 2008), 363.
이다. 이 은유는 기독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7의 절대 신수(神數)의 2회 리듬 예수님의 자리가 된다. 이 14회는 7의 2회 리듬으로 문학과 신학이 연결 되게 이영지, 『물의 신학과 문학』 (서울: 영예문학, 2013), 39.
 한다. 성경의 2회 자리를 스티븐 F. 바커(Stephen F. Baker) Stephen F. Baker, 『수리철학:  Philosophy of Mathematics(Prentice-Hall Foundation of Philosphy Series)』, 이종권 옮김 (서울:  종로 서적출판주식회사, 1983), 88-92. 
는 예수님 족보와 관련하였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 마음은 물로 하여 신학과 문학이 같이하는 신비로움을 1차적 의미에서 2차적 의미로 이동하는 은유로 한다. 은유는 이동 혹은 초월 Ibid, 『기독교 문학의 이론』, 357.
의미이다. 곧 2회의 자리이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는 『무녀도』, 1936)에서 모화가 욱이의 예수 믿음 때문에 아들을 죽이게 한다. 모화도 이어 물에 빠져 죽는데 김윤식은 오직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물이 재생이미지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와의 대화』(서울:  새미, 2002), 396.
로 된다 하였다. 문정희도 불교 시인인『서정주 시연구』에서 물의 변화가 지니는 기독교적 특징 문정희, 『서정주 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서울:  서울여자대학교, 1993), 7.
이라 하였다. 성경에서는 2회 자리를 예수님 자리로 하고 있다. 마음을 다시 고쳐먹은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교류하고 있다. 마음이 글로 나타나는 일은 특히 시의 의태어에서 선시인 한화덕 시인의 경우 선시인이 갖는 내면에서의 깨달음 특히 허무와 공으로 한다. 시적 상상력이 중요성이 인간에게 무한히 주어진 자유임에 시인은 늘 시 작업을 하는 것임을 밝힌다.
물의 의태어가 지닌 하이퍼성은 이동 혹은 초월과 변화의미이다.

가만히 비가 되는
넌 나의 하얀 운명
정말로 눈물눈썹
하늘이 그립도록
마음의
진주 꽃으로
하얀 기둥 달았다 
- 이영지 「넌 나의 하얀 운명」에서 이영지, 『행복의 물을 먹으며, 사랑으로』(서울: 영예문학, 2008), 55.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나님이 계심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기독교시인 이영지에게 있어서는 주어진 대상 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조명한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바램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해석하고 연구하는 자에 따라 달리 비치는 이 중심주제는 하늘의 빛이다. 마음의 빛을 가진 자에게 다가오는 감사함으로 인한 생활의 실제는 빛을 마음에 품은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인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른 물체에 대한 두 시각이 있게 된다. 그저 바라보면서 의태어를 느낄지라도 시를 쓰지 않으면 의태어가 탄생하지 않으면 보는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생각을 끌어내는 일은 시인이 되는 일로 의태어가 탄생한다.
빗물은 시인의 마음에 늘 스며든다. 동시에 마음도 언제나 상대방에게 늘 스며든다. 그 곳에선 서로 마음이 교감되는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아름다운 마음을 나누는 일은 행복이 샘솟게 한다. 좋은 물을 먹으면 아름다운 글이 태어난다. 물 곧 말씀을 가진 생명의 원동력은 새로운 삶이 생겨지고 그에 주어진 대상을 아름답게 조명한다.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물은 물위로 걷거나 물속에 가라앉거나 물을 매개로 한 하늘로 올라가는 등의 상상력이 총 동원 이영지, “물과 불의 시조 창작적 一例” 『새 국어 교육』제 52호 (서울:  한국국어 교육 학회、1996), 7-11.
되면서 기쁘고 즐거웁고 감사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이 행복의 구심원은 물속이다. 곧 말씀 속에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물은 절대적으로 마음과 관련된다. 이퇴계는 인간본성을 찾는 진리 찾기를 상대방을 향한 경철학 이황, 『退溪全書』5책 (서울:  성균관대 대동 문화 연구원, 1981). 22책 (서울:  퇴계학 연구원. 1987). 금장태, 『聖學十圖와 퇴계 철학의 구조』 (서울:  서울 대학교, 2001), 8, 23.
에 둔다. 철학과 문학과의 접맥은 물의 경우 그리움의 정서이다. 그리움이란 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내는 맑은 심성으로 남을 높이는 데서 발생한다.

옥수수 참외참외 여름이 익는 밤이 참 참외 익혀가며 한낮을 걸어오자 내 산은 지금마악 한차앙 익어들고 마음은 한창 익어가 불러들인 강물에 강물에 한강물이 하안창 불어나며 가슴에 들이밀며 발목에 감아들며 커다란 부피로 들며 들이치는 한여름 하늘물 웃음속이 훠언히 들어나는 옥수수 촘촘히로 참외씨 촘촘히로 쾅쾅쾅 여름소나기 들이밀어 붙이는
- 이영지 「옥수수와 참외의 여름」

이영지의 시의 하이퍼성은 얼핏 보기에는 시의 외연이 여름 옥수수로 단순한 먹을 거리 옥수수 같지만 이러한 외연과는 달리 옥수수 곧 한문화권으로 이야기 할 때 옥수(玉水) 곧 맑은 물이다. 옥수수(玉水水)는 아주 맑은 물이다. 이 시의 하이퍼성은 엄청난 시의 내포 옥수수이다. 한창 여름에 그 맑은 물이 더욱 맑아지는, 다시 말하면 물의 의태어에 대한 절대의 물의 가치이다. 참외는 참으로 익어가는의 의태어가 된다. 따라서 이 참된 진리가 익어가는 계절이 된다. 단순한 물의 의태어에서 벗어나 물이 그 양을 많이 하면서 새벽기도가 주는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익어가는 이영지 삶을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시에서의 외연과 내포의 긴장성이 있을수록 시의 하이퍼성이 된다.

Ⅳ.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문학과 중국문학에서의 상이성과 유사성에 대한 비교연구를 위해 물의 의태어를 중심한 시와 시조의 물을 보았다.
임의 물을 선택하여 중국 선시는 '물'이라는 대자연을 통해 바슐라르의 역동적 2단계 상상력에서 비추어지는 볼 때 물의 깊이를 주로 다룬다. 空(공)으로 보고 고요함의 마음을 의태어로 한다. 곧 물을 통하여 물이 깨끗함이라는 등식을 정하고  마음의 어지러움을 제거해 버린 뒤에 나타나는 마음의 고요로움이다. 물이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관계없이 물에 대한 상상력 동원으로 비교적 선종의 뜻에 부합하게 마음의 물을 하이퍼성으로 하였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시로 조명된 시조에서는 바슐라르 상상력의 4단계인 물의 의태어를 통한 세상의 삶을 은혜와 감사에 의한 구원이 주제이다. 
조선시대 이황은 물과 사물과 삶 일치로 한다. 깨끗한 물을 찾아 벼슬도 버리고 퇴계를 찾는다. 물을 대명사로 한 자신의  일상과 동일시 한 퇴계철학은 언제나 맑은 물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려 하는 안정과 깨우침을 하는 물의 하이퍼성으로 하였다. 이러한 하이퍼성은 「청량산가」를 통해서 물 그 자체, 눈에 보이는 물이 아니라 산봉우리가 많지만 12봉우리를 택하고 66봉이라 시에 소재로 삼은 다음 그 봉우리 모양을 복숭아꽃과 일치시켜 철학적 아름다움을 물의 하이퍼성으로 한다. 물의 시적 하이퍼성은 물이 한 번도 시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도화와 흰 갈매기를 시조의 외연으로 하여 삶의 깨끗함이 곧 맑은 물의 깨끗함과 오버렙되는 하이퍼성을 제시한다. 시의 외연은 물에 떨어진 복숭아 꽃이 사실은 물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상상력의 시로서 그의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력의 하이퍼성이다. 이 가상현실의 시조작법인 물의 하이퍼성은 백구의 비상과 도화 낙화의 아름다움을 떠들 어부로 대신하면서 고도의 은유적 물의 의태어 하이퍼성으로 한다.
시조에서의 물을 통한 의태어의 하이퍼성은 황진이 시조와 이영지 시조에서 전자 황진이 시조 ‘청산리 벽계수’에서 그녀의 달 속에 들어가 상대방이 쉬어가기를 원하는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달 향기를 물의 하이퍼성으로 한다. 이 하이퍼성은 ‘동짓달 기나긴 밤’에서 시의 내포의 의미 숨음을 통하여 물이 표면화하지 않더라도 사랑 힘으로 문학작품에서 승화된다.
이영지 시조에서의 황진이 이야기는 꽃무덤 치마폭 한 수로 하여 이야기의 유래에 그치지 않고 꽃상여가 나는 날을 종교적 형이상학성으로 한 기독도교시의 특징으로 한다. 물의 하이퍼성은 이 사랑을 신이 부여한 힘으로 얻어지는 하늘오르기로 하고 있다.
이 때 대두되는 것이 선시와 기독교시와의 구별이 있게 되는데 이황시대에 제시된 주자학 근거인 소수서원을 중심한 백운동 향학은 유교와도 그 맥을 같이 하여 유교문화권 안에 존재하는 선시와 기독교시가 있게 된다. 주자학에 내세우는 하늘의 이치는 이황은 경사상으로 접목되면서 한국의 시가 겸손과 그 주제미를 중요시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고도 엄연히 존재하는 선시와 기독교시의 상이성과 유사성은 산사의 풍경에서 물이 중요시되고 이 물은 기독교시에서도 중요한 물의 하이퍼성으로 존재한다. 둘의 차이는 마음의 깨달음과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와의 구별로 남는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물의 푸르름을 주제나 시의 외연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이 또한 이퇴계의 시조에서도 동일하다. 따라서 선시나 기독교시에서 그 의미구성이 되는 물의 의태화는 기독교시가 물이 퍼져 하늘로 올라가는 물의 하이퍼성을 통한다면 선시에서는 물이 주는 역할을 바슐라르의 2단계인 과장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의 구별은 불에서 물을 보기도 하고 물에서 불을 보는 한화덕 시인에게서 선시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중국의 일반 시들이 가지는 선시와 기독교 시의 구분은 선시가 ‘선'과 '시'로 구분되듯이 기독교 시 또한 문학에서 시와 기독교로 구분되는 문학성의 가치는 선시는 깨달음을, 기독교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이다. 자의적인 점과 타의적인  비중이다.
물의 시적 하이퍼성은 무한으로 늘어날 가능성을 문학 특히 시조는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삼라만상이 연이라 하였거니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본 연구에서는 중국과 한국 두 나라는 문학에서도 연결성을 가진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도 제시되었는데 바라보는 관점, 곧 의미의 주제를 얻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신의 은총으로 보는 관점과 이와는 달리 깨달음의 목적성을 가지는 것과의 차이이다. 한화덕의 선시에서 발견되어지는 물을 통한 상상력은 물과 정화수를 동격으로 놓거나 물을 지혜의 등가법칙으로 놓는 관점과는 달리 기독교시에서는 물을 통한 은혜를 발견하여 그 기쁨을 누리는 결과를 이루는 차이가 있다. 이에 반하여 이영지 기독교 시는 물의 은유를 통한 객관적 사물어를 통하여 이동 혹은 초월과 변화한다. 한문화권과의 관련도 되는 시의 물을 통한 하이퍼성은 「여름 옥수수」에서 단순한 먹을 거리 옥수수 같지만 이 외연과는 달리 옥수수는 ‘옥수(玉水)’ 곧 맑은 물이다. 옥수수(玉水水)는 아주 맑은 물이다. 기독교시의 물 하이퍼성은 엄청난 맑은 물이 옥수수(玉水水)이다. 한창 여름에 그 맑은 물이 더욱 맑아지는, 다시 말하면 물의 의태어에 대한 절대의 물의 가치는 참외가 참으로 익어가는 물의 의태어로 하여 참된 진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단순한 물의 의태어에서 벗어나 물이 그 양을 많이하면서 새벽기도가 주는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익어가는 기독교의 시적 물의 하이퍼성으로 인한 물의 맑음이 드러난다.
이퇴계와 이영지의 가계잇기는 족보와도 깊은 연관성을 가지면서 경상북도 영주지방에 주거하는 가족들에 의하여 발견되는 가계 잇기는 「도산서원 1」이나 죽령 새재에 세워진 작품의 근거시조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3대목과 향가에서 보이는 리듬의 연결로 고려는 물론 이조시대와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이어지는 귀중한 문학보고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중국이 주제를 중요시하는 선시의 경향이라면 현대의 한국에서의 현대시조는 단순한 현재의 돌출이 아니라 그 이음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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