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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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평설

정용진 1 1707
한국의 10대 명시 평설  (한국 시인 100인이 선정한)

1 김소월 1902-1934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별의 이유, 또는 또 하나의 반어
                            이 희 중 | 시인·문학평론가·전주대 교수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연시로 읽지 않을, 또는 연시 이상으로 읽을 도리는 없다. 그만큼 순정한 사랑 노래이다. 이 점이 연시이면서, 연시로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연시 이상으로 읽히는 한용운의 연시들과 선명히 구분되는 자리이다.
이 시의 주제는 ‘이별의 정한’도, ‘슬픈 헤어짐’도 아니다. 이 시의 내용은 가정된 상황에 기초한, 미래의 각오이자 계획이다. “가실 때에는”, “가실 길에”에서 미래시상을 표시하는 “ㄹ”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또한 “보내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우리다”에서 “우”는 존대의 뜻을, “리”는 계획의 뜻을 표시한다. 셋째 연의, “가시는”과 “놓인”에 쓰인 현재시상은 가정된 미래 상황 위에 얹힌 제한적 현재로 보아야 한다. “가시옵소서”는 기원 또는 완곡한 명령이므로 현재 실현되고 있는 행동과 상관 없다. 그러므로 이별은 목전의 일이 아니다.
시의 화자는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을 걱정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때는 언제인가. 현재 진행되는 사랑이 불행한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여길 때이다. 물론 이 판단은 주관적일 수 있다. 객관적 상황이 그럴 수도 있으나, 주체의 심리적 성향 때문에 과장 또는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내/네가 떠난다면’ 같은 유의 가정은 사랑의 현재를 확신하게 하고 이 확신을 공고히 하는 데에 자주 소용된다.
시의 문면에서 화자가 미래의 이별을 걱정할 객관적 증거는 없다. 걱정하는 화자만 있다. 이별은 현재 징후로만 존재할 수도 있고 아무 징후도 없을 수 있다.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은 현재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소심한 연인의 내면에서 반추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내용은 ‘이별을 당면한 연인의 각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복한 투정’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떠나는 연인의 발 아래 눈물 없이 꽃을 뿌리겠다는 화자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놀라움은 ‘어쩌면 그렇게 거룩할 수 있는가’, 또는 ‘어쩌면 그렇게 독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설 또는 반어로 이 각별한 놀라움의 원인을 해명하려 애써 왔다. 좀더 풍요롭게 읽기 위해서 “나 보기가 역겨워”라는 구절을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과 관련하여 화자가 문제삼는 유일한 이유로 보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의 이유는 다양하다. 둘 사이의 감정 변화일 수 있고, 외부 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화자가 특히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나 보기가 역겨워”이다. 이는 사랑의 근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상대가 보기 싫어지면 사랑은 없다. 사랑이 개재되지 않은 연인은 의미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소멸된 자리이므로 그렇게 거룩할 수 있고, 그렇게 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상대 앞에서 주체는 부끄러워지고 초라해진다.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부족한 상대인지에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사랑 덕택에 밝아진 자의식의 거울이 그를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상대가 바로 그 이유, 즉 자신의 부족을 탓한다면 울지 않고 꽃까지 뿌리면서 고이 보내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자아를 내면화한 윤리적 자아의 대표 발언으로서, 원망을 내면화한 축복의 몸짓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화자가 집요하게 추궁한 하나의 이유, “나 보기가 역겨워”는 그밖의 다른 모든 이유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또 다른 반어 또는 역설이 된다.

2 서정주 1915-2000

화 사 花 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것은
우리 할아버지의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듯…석유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생명력과 절대언어, 그리고 에로티시즘  최 현 식 | 문학평론가

미당 서정주의 등단작은 「벽」(《동아일보》, 1936. 1. 3)이다. 하지만 훗날 그는 「화사」가 자신의 실질적인 문학적 출사표였음을 간곡히 고백했다. 물론 여기에는 투고용 습작품에 불과했던 「벽」이 덜컥 당선되어버린(미당은 2등이었고, 수위는 김혜숙〔본명:허윤석〕이었다) 데 대한 계면쩍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실제적인 이유는 「화사」야말로 ‘인간원형’이나 인간의 ‘구경적究竟的 운명’에 대한 열렬한 탐구의지, 일체의 형용 수식을 배제한 직정直情언어의 활달한 구사를 통한 강렬한 관능적 생명력의 표출 등 초기시를 일관하는 미적 특질을 함축하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화사」는 미당의 직접적인 체험을 다룬 것이 아닌, 오로지 상상력의 산물이다. 거기에는 식민지 현실과 인간존재의 모순이 강요하는 ‘비극의 조무래기들’을 극복하고, 태양과 같은 건강하고도 영원한 생명력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미당은 그것을 ‘화사’와 ‘나’가 동화되는 과정의 묘사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화사’는 시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시적 자아, 아니 인간일반의 대리적 형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름답되, ‘크다란 슬픔’을 지녀 ‘징그라운’ 양가적 존재이다. 이러한 ‘화사’의 모순적 본질은 인간을 ‘악’에 빠뜨린 결과 받게 된 이중의 징벌, 즉 ‘에덴’에서의 추방과 ‘절대언어’(어떤 대상과도 소통 가능한, 신화세계의 언어라는 점에서)의 박탈 결과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로 표현된 ‘화사’의 행동은 바로 그런 징벌에 대한 공격적 항변이자, 훼손 이전의 자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역설적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화사’의 양가성은 인간일반, 특히 시인 자신의 것이다. 인간 역시 신의 세계에서 추방됨으로써 시간과 죽음에 제약당하고 태초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유한자가 되었다. 서정주 초기시에 자주 등장하는 불구자의 이미지, 이를테면 ‘벙어리’ ‘문둥이’ ‘소리를 빼앗긴 앉은뱅이’ 등은 그런 부자유와 불완전에 갇힌 인간의 근원적 비극을 담아내기 위한 형상들이다. ‘화사’도 그렇지만 이들 역시 ‘언어의 박탈’로 인해 비극의 정점을 달리며, 그러면서도 ‘발성될 수 없는 내면의 말’을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써 존재의 한계를 초극하려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미당에게 ‘생명’과 ‘인간 원형’에 대한 관심은 곧 언어에 대한 그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화사’는 어쩌면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이 가탁된 미학적 가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후반부의 에로티시즘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화사’로 상징된 심층 자아의 욕구에 충실함으로써 현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생명력과 언어를 성취하려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크레오파트라’와 ‘순이’로 대표되는 여성과의 합일 욕망으로 축소하여 제시함으로써, 존재의 새로운 도약을 상당히 제약하고 만다. 그래도 미당다운 점은 성적 합일의 메타포로 ‘고흔 입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입술에서는 분명 어떤 가식도 의도도 없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사랑에 겨운 비릿한 ‘말’이 흘러나왔을 터, 그것 또한 ‘절대언어’의 한 모습은 아닐까.

3 정지용 1902-?

향 수 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생의 근원에 대한 동적 에너지    최 동 호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정지용(1902∼?)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시문학》 동인으로 활약하였으며 휘문고보 교사, 이화 여대 교수, 《문장》지 시부문 추천위원,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정지용은 우리 현대 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대다수 시인이 감정의 분출에 의거하여 본능적인 시를 썼다면 1920년대 초반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여 1930년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군림하게 된 정지용에 의하여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 내는 시가 씌어진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정지용이 철저히 인식했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정지용의 대표작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작품 한 편을 들라고 한다면, 우리는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향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동원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지용의 「향수」는 노래하는 사람 모두가 언제나 따뜻한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정지용은 「향수」에서 독특한 감각적 표현을 율격 언어로 응축시켜 한국인들이 마음의 고향에 도달하는 심정적 통로를 열어 보였다.
「향수」가 그려내는 고향의 정경은 누구에게나 있었음직한 추억이며 따라서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서적 호소력에 힘을 더하는 것은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의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에서 보이는 언어적 환기 효과는 당시로서는 특별한 예이다.
「향수」는 모두 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연은 후렴구(―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의 반복을 통해 하나의 음악적 울림으로 묶여져 이들 모두가 고향에 대한 화자의 애틋한 정서를 실감있게 재현한다. 고향을 명료하게 묘사하기 위해 후렴구와 이어지는 매연의 마지막을 ‘우는 곳’, ‘고이시는 곳’, ‘휘적시던 곳’ ‘이삭 줍던 곳’, ‘도란거리는 곳’ 등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 또한 주목되는 수사법이다. 첫째 연의 고향에 대한 공간적 환기와 둘째 연의 전형적인 농가의 풍경에서 제시되는 육친에의 그리움에 이어 셋째 연에서는 화자의 구체적인 성장 경험이 표현된다. 흙에서 자란 마음과 파란 하늘 사이의 화자의 행동 모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것으로서 유년 시절의 낙원에 대한 믿음을 연상시킨다. 그 정경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단순히 돌이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이상과 낙원에서 괴리되어 타향을 떠도는 현재의 상황을 시사한다. 넷째 연에서 다시 ‘어린 누이’와 ‘아내’를 빌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드러내고 다섯째 연에서는 계절의 순환과 더불어 포착된 고향집이 그려진다. 고향집이 내포하는 평화롭고 정겨운 감각으로 인해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가난의 어려움마저 가족들의 대화를 통해 넘어서게 한다.
「향수」는 20년대 초반의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와 고향을 그리는 젊은 청년의 열망이 용해되어 있는 까닭에, 오늘의 우리들 또한 상실한 낙원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생의 근원에 대한 동적 에너지를 담고 있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이를 넘어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향수」는 생의 근원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을 일깨워 준다.

4 김수영 1921-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발목까지/발밑까지”의 의미      정 과 리 | 문학평론가

문학성이 ‘잘 빚어진 항아리’로서의 작품 안에 담겨 있다기보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화응을 통해서 생성되며 변화한다는 현대적 관점은 김수영의 「풀」에 역설적인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역설적인 방식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이 시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한 편의 완미한 서정시이자 김수영 시 전체의 최후의 결산으로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태, 즉 김수영의 모든 것을 「풀」 안에 압축해 넣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이, 지금의 눈으로 언뜻 봐서는 평범한 서정시로 스쳐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또렷이 부각시키고 그 수명을 성큼 늘렸던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봐서? 그렇다. 이 시의 주제라고 일컬어져 온 ‘민중의 생명력’은 이젠 진부하거나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가 발표될 즈음에서 보자면 이 시는 역사의 중심을 지식인(의식인)으로부터 민중에게로 돌려놓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단절의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숱한 아류들뿐만 아니라 정희성의 「답청」 같은 수작을 낳은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오늘 누가 저 순진한 믿음을 여전히 비벼대고 있겠는가?
게다가 김수영 시의 총결산이라고 이해되고 있는 이 시가 실은 그의 다른 시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흔히 간과되어 왔다. 김수영 시의 특장 중의 하나는 시의 화자가 시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목청을 드높인다는 것인데(그래서 김현은 “그의 시가 노래한다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풀」은 정말 김수영의 시인가 의심을 하게 할 정도로 온전히 묘사적이다. (「폭포」도 묘사적이지만, 묘사의 격정이 시의 화자의 존재를 단호히 그리고 격정적으로 알리고 있다. 아니 그 단호함과 격정이 화자 그 자신이며, 그 단호한 격정적 화자는 바로 ‘폭포’를 묘사의 행위로써 체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풀」에 드리워졌고 오늘날까지도 퇴색하지 않고 있는 그 영광은 단지 지나간 믿음의 화석으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끈질긴 교육의 기념비이고 박물관 건물 안의 명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회의를 이겨낼 만한 힘이 「풀」에는 분명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저 과거적 사건의 반향이 아니라 이 작품의 내재 구조의 내구력이다. (그리고 내구력을 가진 것만이 독자와 반향할 수 있다. 문학성에 관한 고전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 내구력은 적어도 세 개 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우선, 섬세한 문학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풀」의 리듬이 그것이다. 황동규가 직관적으로 ‘주술적’이라고 정의한 그 리듬은, 서우석에 의해서 분석되고 김현과 김치수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이해된 바에 의하면, 바람/풀의 명사적 대립의 반복이 아니라 눕다/일어서다, 웃다/울다의 동사적 대립의 교차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동사들의 교차 반복이 자아내는 효과는 무엇보다도 운동감이다. 운동을 일으키는 한 시는 화석으로 굳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은,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는 한, 활동을 증대시키는 만큼 의식을 마비시킨다. 의식의 마비가 절정에 다다르면 주술에 빠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김수영의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시가 무엇보다도 의식의 고뇌이고 그것의 벼림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니 과연 그럴까? 정말 이 시는 오직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시에는 눕고 일어서며 울고 웃는 동작의 되풀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작의 물결과 마찰하면서 이 반복적 리듬을 첨예하게 인지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서우석이 설명없이 제시하였고(“풀과 신발만이 화면에 가득찬 정경”) 김현에 의해서 날카롭게 포착된, 그러나 이후의 평론가들에 의해서 은근히 무시된, 숨은 존재의 무엇이다. 그러니까, “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의 ‘발목’, ‘발밑’으로 지시된 존재의 발목, 발밑이다.
시의 본령이 디에게시스Diegesis라는 일반적인 합의에 근거한다면, 이 발목으로 지시된 존재는 화자 이외의 인물일 수가 없다. 화자는 묘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인물로서 풀과 바람의 너울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가 온전한 묘사시라는 앞서의 진술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이 시에서도 김수영은 실상 시의 상황 속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의 내구력이 저장된 두번째 창고층이다.) 다만, 그의 다른 시에서 화자가 ‘말’로써 개입하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발목’으로써 개입하고 있다. 발목으로 개입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이 점이 김현의 분석에서도 간과되어 있는 점이다. 김현은 발목으로 지시된 존재의 ‘서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그 서 있는 존재가 풀의 ‘울음’을 ‘웃음’으로 뒤집는다고 해석하게 한다: “「풀」의 비밀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람/풀의 명사적 대립이나, 눕는다/일어선다, 운다/웃는다의 동사적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풀의 눕고 욺을 풀의 일어남과 웃음으로 인식하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누워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의 체험이다.” 그이다운 해석이다. 김현은 활동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 활동하는 개인이 민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사람’은 깨어 있는 의식인이다.
그러나 시 자체는 그러한 해석을 보증하지 않는다. 일반적 상황에 비추어보아도, 깨어 있는 의식인이 곧바로 삶의 비탄을 유쾌한 생의 활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할 근거는 없다. 민중에 기대든 의식인에 기대든 그러한 발언은 단지 소망의 피력일 뿐이다. 독자가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가 발목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유일한 사실이 의미의 원천이며, 내구력의 세번째 창고이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자. 바람이 불고 풀이 쓸렸다 일어났다 하는 풀밭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이 사람이 풀밭에 있지 않은 다른 사람과, 가령, 근처의 어느 집 문간에 있는 사람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두 사람은 모두 풀의 쓸리고 일어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풀밭에 있지 않은 사람은 단지 볼 뿐이다. 풀밭에 있는 사람은 또 하나의 감각을 체험한다. 바로 발목에서 바람과 풀의 오묘한 밀고 당김을 느낀다는 것, 체감한다는 것 말이다. 그 체감은 또한 풀밭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도 다르다. 후자들은 풀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바람과 풀의 ‘작란’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 있는’ 존재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 하겠는데, 그러나 그 서 있는 존재는 세상의 고통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사유하는 주체의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의식인이라기보다 감각적 존재인데, 그 감각은 세 가지 감각들의 동시적 복합체이다. 그는 우선 “비를 몰아오는 동풍”을 몸으로 맞는 존재이고(풀과 함께), 다음, 풀의 쓸리고 일어남을 보는 존재이며, 마지막으로, 풀과 바람의 밀고 당김을 발목에서 느끼는 존재이다. 풀밭에 앉아 있는 존재는 첫번째와 두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마지막 감각을 체험할 수 없으며, 풀밭에 누워(혹은 엎드려) 있는 사람은 첫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나머지 두 감각을 체험할 수 없으며, 집 문간에 있는 사람은 두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있으나 첫번째와 세번째 감각을 체험할 수 없다.
풀밭에 서 있는 존재가 느끼는 이 세 이질적 감각의 동시성이 풀의 울음을 울고 웃음으로 풀의 쓸림을 눕고 일어남으로 ‘인식’케 한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풀의 울음은 풀 그 자신으로부터 터져나온 게 아니라 첫번째 감각을 겪는 자의 풀에 대한 감정 이입의 결과이며, 풀의 누움 역시 두번째 감각의 주체가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을 첫번째 감각의 주체의 감정을 투사해서 얻어낸 인식이다. 풀의 일어남은 우선은 두번째 감각의 주체가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이지만,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명명한 데에는 그가 풀의 누움이라고 인식한 것을 ‘추정적으로’ 늘리고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소망’의 작업이 작동하고 있다. 이 소망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첫번째 감각의 주체가 느낀 고통스런 감정의 회복, 즉 울음을 웃음으로 뒤집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 소망 작업의 현실적인 근거는 두번째 감각의 주체에게는 없다. 오직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존재는 세번째 감각의 주체, 즉 발목의 주체이다. 이 발목의 주체는 눕고 일어남을 체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타자들의 사건이 주체의 감각에 전달된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이것은 ‘고통을 겪는-나’와 달리 풀과 바람이라는 고통 모르는 존재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작란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즐거운 짐작을 갖게 된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든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와 같은 묘사는 일단은 그 짐작된 작란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작란하는 타자로서는(이 작란하는 타자는 이미 그의 초기시 「공자의 생활난」, 「달나라의 장난」에 나타났었다) 풀은 고통 모르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첫 연에 기술되어 있듯이 그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하는 존재이다. ‘나’는 고통하는 존재로서 풀과 동렬에 서며, 이 연관 덕분에 고통 모르는 존재들의 놀이인 풀-바람의 작란에 동참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세번째 감각의 주체 즉, 순수 감각의 발목 주체에 첫번째와 두번째 감각 주체들의 공동작업인 소망의 작업이 끼어들어(이 세 주체는 실은 한 주체이다. 이것이 세 주체의 자연스런 이동과 협력을 가능케 한다), 동풍을 이겨내는 의지의 표상으로 풀을 재구성한다. 두번째 연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의 ‘빨리-먼저’의 추월형(앞질러 달아나기야말로 작란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이 세번째 연에서 “늦게 누워도/ 〔…〕 먼저 일어나고/ 〔…〕 늦게 울어도/ 〔…〕 먼저 웃는다”의 ‘늦게/먼저’의 대결형으로 바뀐 것은 그 재구성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 재구성의 결과는 의지의 획득이나 행동의 실천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성으로 열어놓는다는 것일 뿐이다. 풀의 사건에 발목으로 참여한 ‘나’는 몸 전체로는 참여하지 못한다. 상상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그 동참의 순간 그는 스스로 타자가 되어버리고, 그의 ‘고통받음’이라는 주체의 성질은 엄연히 남는다. 마지막 행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로 메지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생의 한복판에서 맞는 고통의 엄존성을 똑바로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고통 겪는 존재가 발목의 체험에 힘입어서 근본적인 즉 뿌리째 뒤바뀌는 존재의 전환을 열망케 하는 존재로서 재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개의 이질적인 감각의 복합이 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존재와 열망 사이의 날카로운 의식이다. (지나는 길에 덧붙이자면, 이 가능성이 실천태로 나타난 것은, 물론 ‘풀’이라는 제재 상징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훗날의 시인 천양희가 “풀아 날 잡아라/내가 널 당겨 일어서겠다”고 요청한 「풀 베는 날」에 와서이다.)
그러나 이 날카로운 의식은 관념적·이상주의적 의식이 아니라 체험적 의식이며, 분열적 의식이 아니라 운동감각적 의식이다. ‘발목, 발밑’이 그 체험 운동이 샘솟는 장소이다. 이것, 즉 의지의 실현을 가능성으로 여는 체험 혹은 운동감각이, 지극히 의식적인 이 시인이 4·19의 좌절 이후 피 말리는 고통 끝에 가 닿은 마지막 지점이다. 4·19 직후부터, 특히 4·19의 좌절 이후 ‘신귀거래’ 연작과 더불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바로 존재와 의식의 근본적인 괴리이며, 그가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인 것은 존재를 앞질러 나아가버린 의식을 어떻게 존재케 하는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그 투쟁의 도중에서 그는 「거대한 뿌리」에 와서 그 해답을 관념적으로 선취하고, ‘꽃잎’ 연작의 “여름풀의 아우성”에 와서 실제적으로 인지하게 되며, 「풀」에 다다라 마침내 그것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체험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발목으로만 겪는 체험이다. 그러나 그 부분성 때문에 그것의 의미는 더욱 첨예하게 의식된다. 그 첨예한 의식이 짧은 서정시 「풀」을 더욱 날카롭게 떠는 악기로 만들어, 훗날의 숱한 시인들로 하여금 그것에 앞다투어 호응케 한다. 「풀」의 관념적 영광은 교육과 제도(정부적이든 비정부적이든)의 소산이지만, 그것의 실제적 영광은 미완성의 형식으로 완성된 텍스트의 구조의 결과이다.

5 백석 1912-1995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거리와 방의 세계  이 경 호 | 문학평론가

이 시편은 떠돌이 생활을 삶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백석의 자전적인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남신의주’란 평안북도 지명이며 ‘유동’은 그곳의 동네 이름이고 ‘박시봉’은 그가 ‘방’ 하나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의 이름이다. 원 제목은 한자로 되어 있는 바,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낯선 글자는 ‘방方’이라는 제목의 끝 글자일 것이다. ‘방方’은 한자의 뜻으로 ‘방房’과 쓰임새가 같다고 하니, 세들어 사는 방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내용은 시의 화자가 타지에 세들어 사는 방에서 꾸려가는 외롭고 무기력한 삶에 대한 회한과 그 회한을 이겨내는 마음의 과정을 세밀하면서 실감나게 표현해 보여준다. 이 시편은 또한 그의 시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전반적인 특징인, 서사성과 토속적인 어휘, 그리고 감각적인 묘사가 잘 조화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제 그 낱낱의 내용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화자가 지금 사는 셋방에 들기까지 이끌어온 삶의 내력(1행-8행), 셋방에서 무료하고 쓸쓸하게 보내는 일상과 삶의 회한(9행-19행), 삶의 회한을 극복하는 마음가짐(20행-끝) 등이 세 부분을 구성하는 내용이다.
첫번째 부분은 가족과 헤어진 쓸쓸한 삶의 모습을 날씨의 특징으로 묘사한 점이 자연스러운 실감을 획득한다. 날이 저물고 바람이 점점 세게 불어 추위가 엄습해오는 날씨는 가족을 상실한 삶의 느낌을 보편적인 공간적 분위기로 그려놓고 있다.
가족의 상실감은 서로의 유대감을 나누는 ‘방’이라는 따뜻한 삶의 보호공간을 상실한 거리의 어둡고 추운 공간의 풍경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의 상실=방의 상실’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비책은 우선 ‘방’을 마련하는 것이다. ‘방’이 잃어버린 추억의 공간, 가족과의 동거를 가능하게 만드는 상징적 공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시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는 방의 풍경은 삶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따뜻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춥고, 누굿한(눅눅한) 방”일 따름이다. 혼자 고립되어 있으므로 그렇다. 심지어는 “나 혼자서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게 되는 방의 풍경이기도 하다. 늘 홀로 있으므로 홀로인 몸짓과 홀로인 느낌과 생각만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그럴 것이다.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는 곳이니 무료함이 온통 생활을 지배하는 풍경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방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의 실패한 삶에 대한 회한에만 너무 집착하여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느낌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방은 춥고 어두운 길의 풍경 못지않게 삶의 고립감과 패배감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시의 세 번째 부분에서 방의 풍경은 변화되기 시작한다. 고립된 삶의 자세로부터 벗어나는 시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춥고 습기찬 방 안에서 쓸쓸하고 슬픈 자신의 마음만 들여다보던 시선이 “고개를 들어,/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게 된다. 고개 숙인 시선으로부터 고개 드는 시선으로의 변화, 이 시선의 변화야말로 크고 강력한 삶의 운명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자기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없는 것이 삶의 처지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 들끓던 슬픔과 회한은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혹한 삶의 시련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것에 서러워하거나 괴로워하기보다 그것에 담담하고 의연히 맞서려는 삶의 자세를 준비하게 된다.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까닭도 바로 그 점에 있다. 창문을 때리는 ‘싸락눈’ 소리는 자연스럽게 창밖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싸락눈’을 맞는 창문은 유사한 정황 속에 놓여 있는 다른 존재를 상상해보게 만들어준다. 춥고 어두운 현실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갈매나무’이다. 방 안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소극적인 마음을 버리고 방 밖의 가혹한 현실세계에 대처하려는 삶의 자세를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6 한용운 1879-1944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날카로운 키스 그리고 침묵  황 현 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은 거기 표현되어 있는 깊은 사상과 고결한 감정, 그리고 문어체와 구어체의 교묘한 조합으로 빚어진 신비로운 미적 효과 때문에 오랫동안 훌륭한 시로 찬양을 받아 왔지만, 또 다른 이유로도 유명한 시가 되었다. 나쁜 문학교육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님’은 곧 조국광복이라는 그 난폭한 등식을 고식적인 시 독법의 좋은 예로 자주 거론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쳤던 만해의 열정이 그의 다른 열정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따질 수 있는 여유만 남겨둔다면, 이런 해석이 반드시 해롭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해는 「불교유신론」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에서 그 금과옥조가 되는 것은 모두 불경의 해석이 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거꾸로 새기면 불경의 세계관에는 동서고금의 철학에 그 차별을 지울 수 있는 깊이와 넓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시집 『님의 침묵』의 <군말>에서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말하는 만해의 님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님이 누구이며 무엇인가가 아니라, 님과 시인이 맺는 관계이다. 다시 말해서 그 님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님을 님으로 만든다.
만해에게서 그 관계는 날카롭다. “날카로운 첫 키스”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는 운명의 순간이다. 주눅 들었던 한 인간이 그리움을 가득 안은 인간으로 바뀌는 이 분수령은 칼같이 날카롭다. 이렇게 운명이 바뀌는 순간 님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칼날의 분수령 저쪽에 있는 그의 낡은 기억으로는 님의 형상을 짐작할 수 없으며, 날카로운 키스의 순간에 얻은 새로운 기억은 너무 짧고 너무 강렬하여 오히려 님의 얼굴을 감춘다. 시인은 귀먹은 자가 되고 눈 먼 자가 된다. 님은 사라진다. 그러나 등을 돌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쳐서’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여전히 님을 대면하고 있다. 님이 아득하게 먼 자리에 물러나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좁은 인식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이렇게 님의 만남이 곧 님과의 이별이지만,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손 닿을 수 없는 저 자리에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만일 내게 님의 말이 들린다면 그것은 저 낡은 기억의 언어로 들릴 것이며, 만일 내가 님의 얼굴을 본다면 그것은 저 낡은 세계의 모습으로 볼 것이다. 보이지 않음과 들리지 않음으로 나는 님을 안다. 그래서 이별은 희망이며 사랑이다.
들리지 않는 것과 의미 그 자체인 것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거기 있는 것 사이에서, 이별과 사랑 사이에서, 님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래하는 것이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 시인의 의도가 따라잡지 못할 곡조를 마침내 제 스스로 얻게 되는 이 노래에는 벌써 침묵하는 님의 소식이 섞여 있다. 시인이 님의 결여를 말하는 자리는 이제 님의 노래가 아련하게 들어설 자리다. 시는 님의 말을 전하는 언어가 아니라 님이 거기서 말하게 하는 언어다.
「님의 침묵」은 현대적이다. 우리 시사에서 시를 존재 인식의 근본 수단으로 삼은 최초의 시라는 뜻이다.

7 김춘수 192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은 우리들  정효구 ㅣ 문학평론가. 충북대 교수

나는 김춘수의 시 「꽃」이 그의 대표작이며 동시에 대중적 호소력까지 가질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한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가, 너와 나로 표상되는 인간과 인간 혹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창출해내고 싶다는 우리들의 깊은 소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실존주의자들의 견해를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미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을 가하며, 몇 가지 말들 ― 기투성, 잉여성, 우연성 ― 에 사로잡혀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맬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땅에 태어나 삶을 꾸려가는 인간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김춘수의 「꽃」은 인간들의 이런 원형적인 성감대를 건드리고 있다.
다음으로 그 다른 하나는, 이 작품 속에서 무가 유로 전변하는, 어둠이 밝음으로 전변하는, 무의미가 의미로 전변하는 신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신비라는 말을 썼거니와 인간들은 이 혼돈과 부재와 결여의 땅에서 이와 같은 전변의 신비를 갈구한다. 그러나 그 신비는 어떤 신적인 존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른바 ‘전변의 신비’는 이 작품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깊은 친근감과 더불어 호소력을 갖게 한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실 속에는 생을 긍정하며 고양시키고 싶은 인간들의 숨은 갈망과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긍정에 대한 꿈, 그리고 고양에 대한 꿈은 언제나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러한 두 가지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먼저 그 하나는, 주체인 나의 적극성에 의해서이다. 이 시에는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는데 바로 그 이름을 불러주는 주체와 그 이름을 부르고자 하는 주체의 능동성에 의하여 그가 뜻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철학적인 문제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 가운데 어느 것에 비중을 두고 탐구했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의 철학사가 이분화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아주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김춘수의 「꽃」 속에는 주체의 적극성 내지는 능동성이 존재생성의 출발점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것이 이 시를 쓰던 당시의 김춘수가 지닌 정신적 거점이라는 점만을 말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그 다른 하나는,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즉 명명행위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선 누군가가 대상인 사물 내지는 존재를 의식하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식과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 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도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와 너로 표상되는 인간과 인간 혹은 존재와 존재를 매개해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이름을 불러주는 이 매개행위에 의하여 김춘수의 시 「꽃」 속에서 너와 나는 <우리>라는 실체로 다시 태어나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낸다.

8 이상 1910-1937

오감도 烏瞰圖

시제1호 詩第一號

13인十三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第一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좃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좃소.

 
20세기를 돌파해 간 한 공포의 기록
                          조 영 복 | 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오감도烏瞰圖」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 지면에 ‘시 제1호’에서부터 ‘시 제15호’까지 연재되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이 특이한 ‘필화사건’ 앞에서 이상은 “우리는 언제까지 19세기에 머무를 것이냐”고 항변했다. 「오감도 시 제1호」는 이상이 동경했던 ‘20세기적인 문학’의 선두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의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혹은 시인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한 독자의 감응에 시의 존재 의의를 둘 때 시어는 그것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오감도」에서 언어는 감정이나 메시지의 전달 수단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이 시에서 언어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주체가 되며 이때 이상이 펼쳐 보인 것은 일종의 기호놀이이며 언어유희이다.
일종의 놀이로서의 언어유희는 제목에서부터 감지된다. 획 하나를 바꾸어 고정된 인식의 틀을 깨는 이상의 방법론은 반어와 아이러니와 에피그람식 글쓰기로 점철된 그의 전 생애를 가로지른다. ‘오감도烏瞰圖’는 ‘조감도鳥瞰圖’의 변용이다. ‘조감도’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상태의 그림이나 지도를 뜻하지만 이상은 ‘조鳥’자를 살짝 ‘오烏’자로 바꾸었다. 까마귀 형상을 한 시인이 조소하듯 아래를 내려다본 거기에는 기호의 나열이자 유희의 질주가 있다.
「오감도 시 제1호」의 구조적인 특징은 전체가 대립과 병렬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막다른 골목/뚫린 골목’’질주하기/질주하지 않기’‘무서운 아해/무서워하는 아해’ 등의 대립이 기본 구조이다. 그러나 이 구별이나 차이는 오직 무의미하다. 언어 놀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정보란, 막다른 골목에 13인의 아해兒孩들이 질주한다는 것, 그 아해들은 무서운 아해거나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것이다. 이상은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라고 썼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서움’(공포)인데, 이 공포의 근원은 바로 ‘오감도’ 분석의 첫째 요건이자 이상 글쓰기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공포의 근원에 대한 탐색은 초기작 「12월 12일」에서부터 「종생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온 것이다. 「오감도 시 제1호」에서 ‘공포’는 ‘13인의 아해’의 ‘13’이라는 숫자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고 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논란이 되어 왔다. ‘기독을 포함한 예수 12제자, 성적 상징, 이상 자신, 당시의 13도’ 등의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무엇으로 보든 그 공포의 근원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자살에 대한 공포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평생 각혈에 시달렸던 이상은 끝없는 자살 충동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것이 이 ‘무서운/무서워하는’ 의식을 만들었다. 자살 충동은 그의 육체를 완전히 탕진하게 만들었고 그의 글쓰기는 그 탕진의 기록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틈바구니에 낀’ 이상의 자의식은 근대와 근대적 글쓰기를 향한 그의 질주를 가속화 시키지만 그는 근대의 가속도에 스스로 질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근대의 원형을 찾아 동경을 향했다. 거기서 그는 근대의 달콤한 레몬(멜론) 향이 아닌 매캐하고 소음 가득한 가솔린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이상은 근대의 깨어진 거울에 자기 스스로를 비춰보았다. 거기에는 ‘28살의 나이에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이 된 자신의 자화상이 있었다.
「오감도」는 당시 우리 시에 있어 전무한 개념의 시였다. 「오감도」는 전통 시 장르에 대한 해체적 시도를 한 첫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상은 다다풍의 시를 한껏 흉내 낸 <삼사문학三四文學>파들을 ‘한 점의 추호도 없는 20세기의 영웅들’이라 불렀지만 그들은 사실 포즈의 영웅일 뿐이었다. 우리 시의 진정한 20세기는 이상의 「오감도」에 의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문학의 언어가 사멸해가는 언어가 아니라 고고학적 탐구에 의해 되살아나는 최후의 언어라면, 이상의 시는 기호적 코라(chora)의 에너지를 스스로 자가발전 하는 에너지의 발현체였다. 당대 문학적 규범과 글쓰기의 전통을 위반한 힘은 이 에너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스스로를 ‘문학의 똥’이 되게 했다. 이 부정성과 불결성이 독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오감도」 이후 한국시사의 부정의 자식들은 이상을 아비로 삼고, 한편으로는 그 아비를 부정해야 할 이중의 과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텍스트 읽기의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쓸 수 있는(writerly) 텍스트’로서 「오감도」는 그래서 역사(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록물이기보다 현재 생성중인 언어 그 자체가 된다.

9 박목월 1916-1978

나그네

강江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완벽에 가까운 언어 조형미  이 남 호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두 가지 종류의 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에는 ‘의미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존재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정교하고 멋있게 표현한 시는 일종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므로 ‘의미의 시’가 될 것이고, 그냥 언어를 매체로 하여 순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미학이 되므로 ‘존재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용운의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는 의미의 시에 가깝고, 김소월의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는 존재의 시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은 억지스런 것이다. 그보다는, 모든 시는 의미와 존재 두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다만 어느 측면이 더 중시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의미조차도 스스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시의 일반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맥클리쉬가 시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뜻이다. 진짜 시다운 시에서는 의미가 오히려 희미하고 존재성이 매우 강하다. 박목월의 「나그네」 같은 시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나그네」에는 의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주제를 말하기가 어색하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주제라고 한다면, 「나그네」는 차라리 주제가 없는 시이다. 이 작품은 그냥 음악이나 그림처럼 어떤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 또는 정서 또는 분위기를 지닌 언어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그런데 「나그네」의 언어적 조형은 절묘하다. 언어의 선택과 배치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나그네」의 아름다움과 매력의 원천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언어적 조형미에서 온다.
3음보 2행으로 된 다섯 개의 연들은 음악성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 쉬운 순 우리말을 사용하여 정겨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휘들은, 고된 일상을 벗어나 한가롭게 떠도는 자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암시한다. 강나루, 밀밭길이 그러하고 술과 저녁놀이 그러하며, 특히 ‘구름에 달 가듯이’가 그러하다. 3연에서 나그네의 피로와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마저도 자유와 여유의 맛을 더하는 향료와 같다.
사실 이 작품은 비논리적인 작품이다. 통사가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강나루 건너서’가 아니라 ‘강을 건너서’일 것이며, ‘구름에 달 가듯이’가 아니라 ‘달밤에 구름이 흘러가듯이’일 것이며, ‘술익는 마을마다’가 아니라 ‘마을마다 술이 익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통사적 문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휘들의 나열을 통하여 미학적 공간은 형성된다. 보통의 이러한 통사적 오류는 심각한 약점이 될 것이지만, 「나그네」의 경우는 워낙 자연스럽고 음악성이 높게 변형되었고 또 그로 인한 미학적 효과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긍정적인 개성이 된다. 특히 ‘구름에 달 가듯이’는 그 통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구의 하나이다.
「나그네」는 꼭 있어야 할 말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미학적 완벽성에 도달한 작품이다.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혹은 고려청자를 감상하듯, 그 언어적 조형미를 즐기며 그 속에서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의 멋을 맛보는 것이 「나그네」의 옳은 감상법일 것이다.

10 윤동주 1917-1945

서 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절대적 양심과 수난의 길  이 건 청 | 시인·한양대 교수

윤동주의 시 「서시」는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계기로 18편의 시를 묶어 펴내기로 했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일부로 씌어진 것이지만, 그의 사후인 1948년에 이 시집이 빛을 보게 되면서 시집의 첫번째 시로 실렸다. 시의 제목이 「서시」인 것은 이 시가 시집의 ‘서문’의 성격으로 씌어진 시이기 때문이다. ‘서문’은 글쓴이가 자신의 글에 대해 가지는 태도나 입장을 표명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시 「서시」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이 시에 대해 가지는 태도나 입장, 시인관이나 인생관 같은 것들이 시 속에 천명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의 1행과 2행에는 그의 삶의 태도가 천명되어 있다. 윤동주가 그의 시 속에 천명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가장 높고 고귀한 절대적 양심의 세계이다. 하늘 앞에 ‘한 점의 부끄럼도 없기를’ 간구하는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 험난한 형극의 길을 골라 딛고 있다. 사람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늘’ 앞에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하늘’은 절대적인 가치이고 그런 ‘하늘’의 절대성에 부합되는 삶을 인간인 윤동주가 이뤄낼 수는 없겠기에 말이다. 더구나, ‘죽는 날까지’ 일관되게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이 이상을 설정하고 꿈꾸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 여건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설정한 이상의 높이를 적절하게 재조정한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해버리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애초에 설정한 이상의 높이를 고집스럽게 관철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시련을 감내할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구한 그는 삶의 목표를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채, 고집스레 애초의 신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스스로 힘들고 험한 수난의 길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셈이며, 역부족이어서 목표치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죄스러워’하며 끝내는 ‘죽음’의 백골이 되어 풍화되어 간다.
그런데, 3행과 4행을 보면 이 시의 화자가 아주 서정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도 괴로워하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것이다. ‘바람’이라는 타율적 힘에 도리없이 흔들리는 나뭇잎을 수난의 존재로 파악하고, 그것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 양심과 순정한 삶을 추구해가면서 현실의 폭압을 견디는 이 자아는 그가 섬세하고 서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도리 없이 더 많은 수난과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난과 상처의 시적 자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구현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자각을 갖는다. 5, 6행에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7, 8 행에서 시인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해 보여준다. 마지막 행은 그가 인식한 자신의 모습이다. 스쳐가는 바람 속에 떠서 제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별, 그것은 수난의 상처를 입고도 자신이 설정한 삶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시적 자아의 인식된 존재이다.
윤동주의 시 중에서도 높은 시적 성취를 얻어내고 있는 시편들은, 이처럼, 그가 천명한 절대적 양심과 현실적 삶의 편차 속에서 괴로워하는 삶을 다루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강한 정신적 긴장을 띠고 있다. 윤동주는 ‘가혹한 삶’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해가고 있으며, 거기서 무섭도록 투명한 ‘백골’의 시적 긴장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는 그런 그의 시인관을 선언처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6-05-05 10:18:01 시인의 시에서 이동 됨]
1 Comments
한인석 2016.06.15 15:22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퍼가서 함께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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