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터뷰 기사-12/이사람의 삶/김완신 기자/여셩중앙

홈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시론, 수필, 감상평 등과 일상적 이야기, 유머, 질문, 답변, 제안 등 형식이나 주제,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하며 향후 이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나의 인터뷰 기사-12/이사람의 삶/김완신 기자/여셩중앙

정용진 0 1330
<이 사람의 삶 >
여성중앙 1995년 3월호
장미 향기에 시심을 싣고...
장미농장 운영하는 시인  정용진 씨
1995 여성중앙 3월호(미주판) 글/ 김완신 기자

 거친 땅에 장미를 피우기 위해 가지를 자르고 물을 주면서 땀을 흘리면 벌써 해는 저물고, 돌아와 가시에 찔린 투박한 손으로 시를 쓴다.
 장미농장을 하는 시인 정용진 씨(55).
 샌디에고 카운티 북단 폴브룩에 그의 농장이 있다. 낮은 구릉과 근처를 돌아가는 얕은 시냇물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이곳에 그는 삶의 뜻을 심고 살아가고 있다. 해가 저물어 갈대숲에 찬바람이 스치고 회색 구름이 나즈막히 내려앉는 저녁이 되면 그는 향긋한 땅내음이 배인 몸을 다시 추스르며 「자신과의 대화」라고 말하는 시를 마주한다.
 그가 도시를 벗어나 산으로 둘러싸인 장미밭에 뿌리를 내린 것도 이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장미농장 이전에 채소를 가꾸던 시절까지 합치면 땅과의 인연은 20년을 이어져 내려온다.
 한국에서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71년 유학으로 미국에 왔다. 미국에 와서는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수학했으며 식품점을 하면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그때에는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재배한 일본채소와 멕시코산 고추가 한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에서 여주농고를 졸업한 그는 재학 시에 배웠던 농사기술을 토대로 77년부터 한국채소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를 시작할 때는 한국채소 농장의 희소성 때문에 그가 재배하는 무, 배추의 인기는 대단했다. 몇 개 없던 한국마킷의 주인들이 농장까지 돈을 싸들고 찾아와 채소를 사갈 정도였다. 이렇게 사간 한국채소는 한국마킷에서 한국에서 직수입한 물건이라는 광고로 팔렸다고 한다.
 온타리오농장에서 6에이커로 시작했던 농사는 몇 년 후에 50에이커의 농장으로 발전했고 농부로서의 생활은 착실한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경쟁도 심해지고 농사의 어려움도 많아졌다.
 농업용수의 가격도 올랐고 여기저기서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격의 덤핑도 시작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그는 한국채소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시를 수확하고 창작의 근원이었던 땅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런 중에 우연히 지금의 장소를 알게 되어 장미농장을 시작했다. 원래 장미 농장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전에 살던 사람이 조그맣게 장미밭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근처의 땅을 개간하고 그린하우스를 만들고 장미가시에 찔리면서 늘려간 것이 이제는 20에이커의 장미밭과 3에이커의 그린하우스를 가진 대규모 장미농장이 됐다.
 모든 농사가 쉽지 않듯이 장미농사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다」는 말로써 대답을 한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는 지난 10여년의 고생이 비추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미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 마치 활짝 핀 장미가 주는 신선함처럼 느껴져 온다.
 「10년 넘게 하니까 이제 겨우 장미 키우기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은 난방용으로 그린하우스에 설치한 난로에서 일산화탄소가 나와 꽃을 망친 적도 있고 비가 많이 와서 꽃들이 모두 떨어져 수확을 전혀 못한 기억도 있습니다.」
 병충해가 많고 적절한 온도에서만 장미가 피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해야 하고 농약비와 난방비로 쓰이는 돈도 수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농사와는 달리 장미농사가 어려운 것은 항상 수요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발렌타인스데이,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어머니날 등에 찾는 사람이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맞추어 개화직전의 장미를 출하해야 하는데 수요가 없을 때 꽃망울이 진 장미를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소용이 없고 한창 시즌에 때를 못 맞추면 재배하면서 했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누구나 장미농장이라고 하면 활짝 핀 장미가 온 밭을 붉게 물들이는 풍경을 연상하고 장미라는 말이 주는 화려한 모습을 기대하지만 정작 장미농장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장미봉우리와 농부의 손을 더욱 거칠게만 하는 가시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장미가 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매력이 있는 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장미를 생각하면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마음에 다가오고 장미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한 빛깔과 향은 다른 어느 꽃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피었다가 지는 꽃이 아니라 장미가 가진 귀족적인 습성은 장미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일생의 중요한 일에 그 화려한 색상과 아름다운 자태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가 갖는 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늦은 밤 그린하우스의 온도를 점검하고 정해진 때에 물과 약을 주어야 하는 단조롭고 힘든 일 중에도 그의 마음에 만개하여 그 누구에게 꽃송이만큼이나 큰 사랑과 행복을 전해주는 장미를 떠올리면 고된 노동도 생활의 즐거움이 된다.
 장미농장을 하면서 기억 남는 일이 있다면 한 미국인으로부터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3천6백51송이의 장미를 주문 받은 일이다. 그 미국인은 이렇게 사간 장미를 그들 부부의 10주년 결혼기념일에 찾아온 축하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미농장을 통해 미국인들의 문화를 배우는 것도 그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장미는 예로부터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할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는데 미국인들 중에 특별한 날, 이혼한 부인에게까지 장미를 선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장미를 많이 출하해야 할 시기가 되면 부인 정선옥씨도 농부의 아내가 되어 손에 가시가 찔리는 것도 잊고 남편의 일을 돕는다. 또한 이들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있다. 주로 먼 거리를 다니는 일이 많아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이럴 때마다 차안에서 듣는 설교테입과 찬송가는 주위의 풍경과 어울려 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는 기회가 된다.
 하루 일과는 오전 4시에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짙은 안개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대지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시간에 전날 준비했던 장미를 싣고 폴브룩의 새벽길을 헤치면서 장미경매장이 있는 칼스배드로 간다. 7시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단을 묶고 저장을 하면서 지난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일들을 한다.
 꽃이 아름다운 만큼 재배가 힘든 장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날 때도 됐는데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고 마치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세심한 정성과 주의로 약을 뿌리고 온도를 맞추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하루를 보낸 후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대하면 벌써 해가 산중턱을 내려가고 있는 저녁이 된다.
 지난 71년 「지평선」동인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후 81년도에 처녀시집 「강마을」을 펴냈고 89년에는 시문학사에서 두 번째 시집 「장미밭에서」를 출간했다. 시 외에도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를 비롯한 에세이집을 발표했으며 제3시집도 원고가 완성돼 출판예정에 있다.
 또한 미주한국문인협회에도 관여하여 이사장과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UC어바인과 하버드대학의 영문과에 각각 재학 중인 두 아들도 시를 쓰는 부친의 영향으로 이미 시인과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를 작정했다.
 그는 자신의 시의 출발을 「자연 속에서 연상되는 지난날의 추억」이라고 하며 「자연과 더불어 엮어가는 삶 속에선 농부로서 육신의 양식을 얻고 시라는 사유의 결정체를 수확한다」고 말했다.
 「시를 쓰면서 농장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항상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을 파기 때문에 계절을 어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고 이런 변화가 시를 쓰는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다. 도시에 살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시를 쓰면서 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문득 창밖으로 던진 눈에는 짙게 내려온 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다. 여름에 노란 유채꽃으로 현란한 자태를 보이던 산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와 황량한 중턱에는 구름뿐이다. 내일이 되면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제 비가 오면 장미밭을 가꾸던 그는 또 다른 장미를 종이위에 그려가야 할 것 같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6-05-05 10:18:01 시인의 시에서 이동 됨]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