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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시학 연구- 이상 시의 기독교 관점 이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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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1 17:43
이상시학 연구- 이상 시의 기독교 관점 이영지
 글쓴이 : 李英芝
조회 : 859  
제8장 이상 시의 기독교 관점

Ⅰ. 작가혼

 1. 일화

정지용이 이상을 처음 발견하고 카도릭 청년지에 작품발표의 기회를 주는 한편 9인회에 가입시키고, 또한 이태준은 이상의 오감도를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게 조용만, “나와 구인회시대” 대한일보‘ 1969. 10. 2: 그는 193년 지용의 지우를 얻어서 지용이 주재하는 잡지 『카도릭 청년』에 매월 그 특이한 형식을 가진 시를 발표하였다. 이듬회 구인회에 입회.
 하였다. 시가 우선 언어의 예술임을 명시했던 김기림,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인문평론』, 1939, p. 74: 최재서가 1939년 10월에 창간하여 1941년에 폐간.
 김기림이 이상의 시를 현대시로 예찬한일이나, 예술품으로서의 시의 회복과 시어의 조탁을 지향하는 시문학 일파의 일원인 정지용이 이상을 천거하였음은 이상의 작품이 시문학파적 시의 음악성과 모더니즘적 시각성의 회화체를 동시에 수렴하고 있는 결과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상이 그의 작품 오감도가 연재될 때마다 독자들의 반발로 물의를 일으킨 후 구인회의 동인들과 어울릴 무렵에도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①. 박형(박태원) 오늘 신문에 난「오감도」를 읽어 봤오? 참, 이거야말로 점입가경이라, 바야흐로 광채를 발산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지, 참 이제 무상들이 모조리 무색해 질거야.
②. 이번에 상영한다는 르네 크레르 감독의「최후억만장자」가 아주 걸작이라는데 나를 관람시킬만한 위대한 아량은 없겠오? 지금의 나는 주머니에 푼 전이 없을망정 나는 천하를 놀려 먹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큰 억만장자가 될 수 있으니 한 번 꼭 보아야겠오.
③. ..이것은 새길의 암시오 앞으로 제 아무게도 굴하지 않겠...
④.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 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이 천 점에서 삼천 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고은, 『이상평전』 (서울: 민음사, 1977) 264, 272, 314 참조./이상, “오감도의 작자의 말.” 『이상전집』 임종국 편저 제 3권 수필집 (서울: 태성사, 1958), 255.


자기 작품에 대하여 굴하지 않는 이상의 시 정신 면모이다. 꿈이 정말 많은 이상이 평소 그가 작품에 대하였던 애착의 일화이다. 오로지 문학만을 위하여 살았던 이상은 ‘문학에만은 때가 묻지 않은 이상 시이다. 정인택은 이상을 제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 때 묻지 않은 시인 정인택, 『朴文』제 2집 (서울: 박문서관, 1938), 6. 
이라고 하였다. 시에 대한 그의 애착 Ibid, 그는 구본웅과 종로의 멕시코에서 1932년의 늦가을을 추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문단 소굴을 만들고 나는 그 문단을 꽃피게 하는 ..“.활판소를 만드는 것도 좋겠어. 아니 바로 출판사를 내가 경영하지. 그대는 쓰고 나는 그대책을 찍어 낸단 말이야“ 라고 본웅이 말을 했을 때 이상은 거의흥분상태로 즐 
은 오로지 문학을 위한 이상, 『이상전집』 (서울: 태성사, 1958), 임종국 편, 제3권, 수필집, 259-260.
  1).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히 있는 별볕 글탄 하나 겪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2) 『시와 소설』 (태성사, 1958)에 대한 일체 통신은 장문사 출판부 이상한테하면 된다(이상) 시석주, 『이상의 생애와 기술』 평화신문 1953, 20.
 자세 정인택, “불쌍한 이상,”『조광』, 306-311.
  1).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히 있는 별볕 글탄 하나 겪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2) 『시와 소설』 (태성사, 1958)에 대한 일체 통신은 장문사 출판부 이상한테하면 된다(이상) 신석주, 『이상의 생애와 기술』 평화신문 1953, 20.
이었다.



1). 초월성에의 기저

이상은 건축가로서의 시인 곧, 위대한 건축이 시의 위대한 꿈으로 시작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합리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시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건축가적 시의 유형 김수근, “시의 기술,” 「문학사상」(문학사상사, 1973. 9), 359).
이었던 이상은 그의 논리적인 시의 표면구조에서 증명되었다. 그러기에 시의 내면 구조에서 시적 꿈이 들어 있는 「오감도」를 지을 수 있었다.
이상은 질서가 들어 있는 우주적인 구조의 리듬과 함수 관계를 꿈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합리적인 시 김수근, “시의 기능과 형태,” 「문학사상」(문학사상사, 1973. 12),.
를 썼다. 때문에 한국문학시사에 타당한 전기를 마련 정한모, 『현대시론』 (서울: 민중서관, 1973), 124.
하였다. 시인이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업적은 창조적인 작품 박용철, “새로 우려하는 노력,” 올해시단, 동아일보, 1935. 12. 24.
이어서이다. 한국문학사에 가장 큰 힘 박태원, “李箱哀史,” 조선일보, 1937. 4. 22. 
이 된 1930년대의 자유시에서 이상시를 제외시킨다 김주연, “시문화의 의미와 한계,: 『작가논총서』 김용직 편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9), 130.
면 그야말로 문학의 공항시대가 된다. 이상의 역사적 문장 “5월 창작폄,” 조선일보, 1937. 5. 1.
의 시가 가진 특성을 찾는 일은 그의 창작 정열 “批評政學의 수립과 그 방법,” 조선일보, 1936. 12-18.
을 통해 시인 전 삶의 자취를 알아보는 일은 시의 작업이 결코 장난이거나 여흥이 아니기에서이다. 특히 이상의 전 자산이 숨어 있는 이 문학을 통해 언어의 조직의 그 신비함으로 하여 문학 신화론이 된다.


(1). 이름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인데 그는 평소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즐겨 썼다. 1923년 3월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경성고 졸업앨범 속에는 이상이 자필 서명한 이상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시켜라!
그것은 발명 보다도 발견!
저긔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이상李箱 문학사사상자료실, ‘李箱은 공사장에서 주운 이름인가?’, 문학사상, 1975. 8(서울: 문학사상사, 1975. 8), 326. 


이 자구는 졸업 앨범 기념으로 적어 놓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알게 한다는 문구를 통해 시인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바로 시의 은유법이다. 한 사람이 그의 고집대로 어떠한 호를 수정하여 고수하려 할 때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붙을 것이다. 이상은 사전에서 이상理想, 이상李霜 등의 낱말이 찾아지지만 이상‘李箱’은 없다. 이 조어 이상李箱의 “이상以上”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을 희망한 그 보편성이다. 이상은 오감도를 통해서 그의 영원성을 주어진 시간 위에다 넣었다.
이상의 필명은 「작품 제1번」 임종국 편, 『이상전집』 (서울: 문서사, 1966), 279: 「1931년」, 「작품 제1집.
에서 “나의 폐가 위장염을 앓다”라고 서문에 기록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작품을 통해서 투영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삶- 관상-을 떠난 이상아異常兒가 필연적으로 있게 된 까닭이 된다. 타원형의 스탠드에 충만해 있는 관중은 그것들의 저네가 형성해 가고 있는 타원형의 의식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개개의 관중은 개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전체를 보기 우하여 관중으로서의 입장을 내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서 이상아異常兒를 찾아내는 천재의 출현이 있다. 이 이상아여 이미 관중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것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관중」, 『이상 수필전작집』(문학사상자료연구실편, 1976. 6), 157.


이상만의 삶을 살아야함을 인식하는 그는 사람을 광선으로 파악 「朝鮮と建築」·「一九三一년」· 「三次角 設計圖」.
하였다. 그의 기독교 순사殉死적 삶을 지향한다.

관통의 벽면이 설비된 조금밖에 아니 되는 여백을 이용하여 그는 사체가 되어가지고 운명의 비문된 차를 운산하고 있었다. 해답은 언제까지나 그의 기독교 순사의 공로를 주장하였다. 그는 비로서 묘지의 지위를 정의하였다. 그때의 시간과 공간은 그에게 하드의 좌표를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그는 현재의 현재 뿐만으로 된 或種의 생활을 제작하였다. 새로운 감정표준에 따라서 그는 신선한 요술을 시작하기까지... . 「얼마 않되는 辨解」 이상전집』 (서울: 문성사, 1966).


때문에 이상의 현실 "이상李箱 -異常“을  "이상以上”으로 하는 이유를 기독교 순사殉死에 두고 있다.

위에서 30년 동안이나 살아온 사람(어떤 과학자), 30만개나 넘는 별을 다 헤어놓고 만 사람(역시) 인간 70이 아니 24년 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인 나는 그날 나의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를 삽입하였다. 이후 나의 육신은 그런 고향에는 있지 않았다. 나는 자신 나의 시가 차압당하는 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 때문이다. 「一九三三. 六 . 一 辯」.
 

이상의 시는 그의 뻔뻔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구원해 주는 구원체이다. 시를 위하여 이상李箱의 일상적 이름을 초월하는 이상以上을 택한 뒤 건강조차 돌보지 않았다. 김기림, “이상의 모습과 예술,” 『이상전집』 (서울: 백양당, 1949), 1-7.」
 더구나 시에 대한 애착은 「날개」 소설을 준비하면서도 그 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시고詩稿는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Ibid.



(2). 첫 문학작품 소설
이상문학의 출발점은 「十二月 十二日」이다. 첫 작품은 개인적인 발언 이상의 장편 소설 「십이월 십이일」은 1930년 2월 15일부터 12월까지 9회에 걸쳐 「朝鮮」에 연재되었다. 그후 「문학사상」에 1975년 재발표 됭T다. 이 작품은 이상의 처녀작으로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李箱 , 「날개」, 「십이월 십이일」한국문학 (서울: 계림문화사, 1977)의 서문에서. 1975년 「문학사상」 9월호에 이 소설의 발표가 있기 전 이상은 1931년 7월 「朝鮮と建築」지에 실린 「異常한 가역반응」「破片의 京致」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1930년 이미 「십이월 십이일」을 발표하였다.
이기도 한 첫작품 소설  「십이월 12일」은 인간이 죽는 것이 철저하도록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 신에게 복수하는 방법임을 제시한다. 소설 내용은 아내를 산후의 발병으로 잃고 고향을 떠나면서 불행하게도 차 사고를 당하게 되나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 후 의학 공부에 열중하면서 줄기차게 살아야할 소명감을 가지게 된다.

①.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다. 허무를 운운할 아무 이유도 없다. 힘차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재생한 뒤의 나는 나의 몸과 마음에 채찍질하여 온 것일세. 누구는 말하였지.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 그러나 나는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렇게... .『이상대표소설집』., 43.

②. 뒤에 육박해 오던 주인 없는 토로는 무슨 증오가 그리 깊었던지... 나의 토로에 거대한 음향과 함께 충돌하고 말았네. 그 순간 우주는 나로부터 출발되고. 공중에 솟았던 나의 그 후 존재를 신화삼아 들었을 뿐일세.
③. 절름바리는 아무래도 면치 못하리라. ..이렇게 근심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④. 나는 그 동안에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네. Ibid. 

기적적으로 살아난 소설의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가 그의 동생 T와 T의 아들 업을 비판 없이 사랑할 것을 다짐한다. 그는 머릿속이 냉수에 담갔다가 꺼낸 것 같이 맑고 투명함을 느낀다. 이상 그가 죽은 후 1939년 발표된 「병상이후」 문종혁, “몇가지 異議,” 「문학사상」, (문학사상사, 1974. 4), 348.
나 수필 「사신私信」이다.

①. 고향으로 돌아오다. 반가히 맞아주는 T. M. 업을 바라보며 사랑이라는 것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실행하리라고 결정하여 버렸다. 『이상 대표소설집』, 93.

②.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도회에 남겨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버립니다. 이상, 『이상 전집』, 제3권 수필집 (서울: 태성사, 1958.), 7. 

③. 나는 24세, 어머니는 바로 이낫새에 나를 낳은 것입니다. 聖 쎄바스티앙과 같이아름다운동생, 로오자룩셈블크으
④. 목상을 닮은 막내누이. 어머니는 우리들 三人에 수태 분만의 고락을 말해주었다. 나는 3인을 대표하여 -드디어..가족을 위하여빨리안해를맞어야겠다고초조하느마음이었다. 나는 24세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드키 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 것이었다. 「육친의 장」,『이상전집』 임종국 편 제2권, 시집(서울: 태성사, 1958), 11.

⑤). 여지껏 가족들에 대한 은애의 정을 차마 떼기 어려워 집을 나가지 못하였던 것을 이번에 내 아우가 직업을 얻은 기회에 동경 가서 고생살이 좀하여 볼 작정이요. 임종국편, 『이상전집』, 201, 「私信」, 150.

⑥. 나 역亦 집을 나가야겠다. 열 두 해 전 중학을 나오던 열 여섯 살 때부터 오늘까지 이 허망한 욕심은 변함이 없다... . 열 두해를  두고 벼르나 남의 맏자식 된 은해의 정에 이끌려서인지 내 위인이 변변치 못해서 그랬던지 지금껏 이 땅에 머물러 굴욕의 조석을 하는 내가 지금 차라리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임종국편, 『이상전집』, 201, 「私信」, 150. 

⑦. 불민한 형이다. 인자의 도리를 못 밟는 이 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정보다 하여야 할 일이 있다. 아무쪼록 늙으신 어머님 아버님을 너의 정성으로 위로하여 드려라. Ibid.

⑧. 은애혜恩愛惠- 나의 착실한 경영이 새파랗게 질린다. Op.dit, 268.





2). 삶에의 도전

이상시의 초월성의 기저는 그의 시나 수필이나 소설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기록되면서 이어령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보다 더 사랑을 문학작품으로 보여준다 하였다.

나는 이 지방에 와서 아무와도 친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질책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도 안되어 슬금슬금 그들은 두어 마디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나로서는 참을 수 없이 무섭다.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위패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 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 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패감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남을 보면 나는 그저 싱글벙글 했다. 그들의 어떤 자는 괴상하다는 표정조차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 할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나는 능히 모자란 글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지된 이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저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이상, 『수필집』, 334-335.
 

이러한 이상식 표현은 신에의 복수라는 것이다. 일상성의 불행에 대하여 그는 가치 없는 일상을 벗어나는 길을 신에의 복수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복수라는 일반적 개념의 의미를 뛰어넘어서 악마적인 것은 신이 들어줄 이 없음으로 절망한다.

그러나 귀뚜라미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화筆舌로서는 전혀 호소할 수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엔 없다.
 
때문에 이상은 그의 소설 「십이월 십이일」을 통해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

①. 참회! 자기가 자기의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면 그는 그의 지은 죄를 속죄할 구 있을까?... .
만인의 신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신은 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 대야를 가지고 그 주인 앞에엎드리어 울며 사죄한다면 그 주인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신까지도 나를 용서할 것인가. P. 114.
② 선생님! A씨나 오라버님이나 그들을 위해서라고 저는 죽을  힘을 닿여 신을 믿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의 존재는커녕 신의 존재의 가능성까지도 의심합니다. 만인을 위한 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한사람의 신은 누구나 있습니다. 창밖의 길 먼지 속에서는 구세군 행려도의 복음과 찬미소리가 가장 처음으로 들려…. p. 117.
③. 오냐, 만인을 위한 신이야 없을망정 자기 하나를위한 신이왜 없겠느냐. p. 119.
④. 신은 이제 나를 징벌하려 드는 것인가? 나는 죄가 없다. 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좀 보아라 나는 죄가 없다!
만인의 신! 나의 신, 아! 무죄. p. 123.
⑤). M 군! 도무지 모를 일이야. 모든 죄가 결국은 내게 있다는 것이 아닐까? p. 134.
 
죄의 문제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이다. 「십이월 십이일」 소설의 주인공 의사는 “업이”를 살려내지 못함으로써 다시 갈등과 좌절에 빠진다.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르를 활용하여 그 책임을 작가의 글 씀에 달렸다고 한다. 

모든 사건이라고 이름 붙을만한 것들은 다 끝났다. 오직 이제 남은 것은 '그’라는 인간의 갈 길을  그리하여 갈 곳을 선택하여 지정하여 주는 첨편에 정립하고 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인간의 한 단편으로서의 종식을 위하여 어느 길이고 걷지 아니하면 아니 될 단말마다.
작자는 ‘그’로 하여금 인간 세계에서 구원 받게 하여 보기 위하여 있는 대로 기회와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구조되지 않았다. 작자는 영혼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작자는 아마 누구보다도 영혼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는- 즉 다시하면 그를 구하는 최후의 남은 한 방책은 오직 그에게 영혼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 하나가 남았다. 「십이월 십이일」.


소설의 화자는, 절망은 영혼을 믿지 않는데서 온다고 하고 있다. 이 작가는 영혼을 부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필연적인 작가의 직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의 작가혼적 절대자를 믿으려는 마음자세이다. 
다음은 소설 「십이월 십이일」의 끝이다.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꺼리는 황막한 이 벌판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p. 152-153.
「십이월 십이일」 끝부분 (1930년 2월 12일 「조선朝鮮」연재. 1976년 「문학사상」 4회 연재.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음으로 하여 오는 황막함을 끝으로 하는 이 소설은 이후 「날개」 소설에서도 초월적 현현顯現을 향하여 날개를 퍼덕이는 겨드랑이의 날개를 그려낸다.
이상의 관심은 기독교에 있다.

...그건 箱의 수다에 언제나 번쩍이는, 더럽게 기독교 냄새만 나는 사고방식... 『문학사상』, 211.


기독교, 영혼, 길을 걷는 사람의 의미를 이상은 그의 시 오감도를 막다른 골목을 초월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작가혼으로!
이러한 산문적 설명은 다음에도 계속된다.

1). 나는 내가 그윽히 음모한 바 千古不易의 蕩兒, 이항이 자자레한 문학의 빈민굴을 뇌살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빼 물리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달아야 되나 보다. 사회는 어떻게, 도덕이 어떻게, 내면적 성찰, 추구, 징벌은 어떻게, 자의식 과잉이 어떻게, 제깜냥에 번지레한 체면을 해내어 겉은 치사스러운 간판이 미상을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종생기」,『이상전집』, 99.

2) 그동안 수개월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서 살아왔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왔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급기야 그가 병상에 쓸어 지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을 순간 -그는 ‘죽엄은 과연 자연적으로 왔다’를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누워있는 동안 생리적으로 죽엄에 가까이까지에 빠진 그의 타오르는 듯한 희망과 야욕을 가슴 가득이 채웠던 것이다. 의식이 자기로 해독되는 사이사이 그는 이 오랜 간만에 맛보는 새 힘에 졸리었다. (보채어졌다) 나날이 말라들어가는 그의 체구가 그에게는 마치 강철로 만든 것으로만 결코 죽거나 할 것이 아닌 것만으로 자신되었다.  「불행의 실천」, 『이상전집』, 227.


마치 예수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늘 언제나 아직도 사랑하시듯이 여전히 이상은 몸이 말라가면서도 사랑을 주장한다.

...다섯 해 세월이 지나간 오늘 엊그제 하마터면 나를 배반하려 들던 나를 나는 오히려 다시 그러던 순정에 가까운 우정으로 사랑하고 있다. 「血書三態」, 문학사상 (문학사상사, 1979. 1), 287.


이어령은 이상을 예수에 견주어 그 비중을 두었다.
 




Ⅱ. 기독교 관점에서 본 「오감도」 시제 1호의 리듬

1, 「오감도」시제 1호

본 연구는 기독교 관점에서 본 이상시 「오감도」의 시제 1호의 리듬'「기독교 관점에서 본 이상시의 「오감도」의 시 제1호의 리듬연구」,『새국어교육』제 67호』(한국국어교육학회, 2004)., PP.313~335.
이다. 오감도의 시제 1호의 ‘13’인의 아해에서 13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들어갈 때 매일 한번 씩 엿새 동안 돌고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일곱 번 여리고성을 돌아 총 13회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일에 접목된다. 이상의 「오감도」 시제 1호의 13인의 이 13 숫자와 같은 조건을 내세워 성경의 여리고 성 점령기는 바로 이상의 오감도에서 일제 강점기하의 우리나라를 되찾는 의미적으로 연관지으는 계기로 설정한 것이다. 이상은 늘 시에서 나라찾기에 구체적인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였었다.
구체적인 기독교 시어는 다음에서이다.
 
크리스트에혹사한남루한사나이가있으니이는그의종생과운명까지도
내게떠맡기려는사나운마음씨다。내시시각가에늘어서서한시대나눌
변인트집으로나를위협한다。은애ㅡ나의착실한경영이늘새파랗게질
린다。나는이육중한크리스트의별신을암살하지않고는내문벌과내음
모를약탈당할까참걱정이다。그러나내신선한도망이그끈적끈적한청
각을벗어버릴수가없다。
                            - 「육친」《朝鮮日報》, 1936. 10. 9.


관통의벽면에설비된조금밖에안되는애벽을이용해서그는사체가되어가지고운명의미분된차를운산하고있었다. 해답은어디까지나그의기독교순사의공로를주장하였다. 그는 비로소묘지의지위를정의하였다.
- 「알마안되는변해」
1). 열두제자와 예수님

(1). 열두제자와 예수님이 함께한 13인
이상은 그리스트에 대해 깊은 관심을 반복리듬으로 하고 있고 그의 시에서 그의 삶과 그의 죽음문제까지도 시를 통해 “그리스트”와 “기독교순사” 시어를 사용하여 심상리듬을 들어낸다. 특히 시제 1호에서 보이는 13인이 다름아닌 12제자와 예수님이 함께한 13인이 되는 일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의 대 전제로 시작되는  리듬대화의 조건은 일제 강점기 상황에 따른 살아남기 위한 긴밀한 시적 텍스트 접근을 성경적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공의롭고 긴박한 일제 상황을 시의 외연리듬 13인으로 하고 있는 이상의 내면심리는 「오감도」의 시 제 1호가 개인의 시적 정서리듬보다는 나라전체가 점령당하고 있는 사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그래서 공동의 삶이 살아남기 위한 시의 리듬이라는 점에서 이상은 절대자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상시 「오감도」 시제 1호는 13인의 시이다. ‘아해’라는 말은 한국 언어에 있는 말이다. 그리고 아해라는 말보다 더 보편성이 있는 아이라는 말로 바꾸어 시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아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된다. 이 어른은 시적 내면의 소리로서 예수이다. 왜냐하면 공생의 생활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13인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을 택하였을까.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운 무서운 상황에서도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 아이들의 특징이기에 이 시는 시가 지닌 본질적인 아이러니성과 의미의 깊이를 지닌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 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六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시제 1호」
                                                   
13인의 아해는 보편적 개념으로 13인의 아이다. 따라서 이 아이를 통해 이 시를 풀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천주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5∼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시를 기독교와 이상시의 연계성으로 한다.
시제 1호의 첫 연은 13인의 아이가 모여 있고 이 아이는 시제 1호 전체 아해이다. 그리고 이 13인이 막다른 골목이 있는 곳까지 달리고 있다. 13인 전체가 결코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지 않다. 예수님도 어린아이가 되셔서 같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은 살려고 달리는 삶의 주파수들 에모트 미사루, 양억관 옮김, 『물은 답을 알고 있다 1』(나무 심는 사람, 2003)., 79 참조.
이다. 시의 이 리듬은 살아있는 자들의 리듬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라는 텍스트언어로 인하여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현실이고 이 현실 앞에서 12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13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는 시적 기독교 관점에 서게 된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시제 1호의 첫 연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는 괄호로 처진 제한적 조건을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로 내세움으로써 절박성이 대두된다. 아이가 된 예수님은 같이 아이로써의 삶에서 질주한다. 그러기에 이 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의 죽음상황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적 가치가 있다. 아주 긴박한 죽음의 순간에 우리를 구해준 분,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보는 보호자가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상황이다. 더구나 예수님이라고 할 때 아이들은 전능자를 소망하는 사역의 일을 예수님과 같이 하고 있다. 
(2). 10명의 한 덩어리와 3명의 한 덩어리
이상의 시는 기독교 정신 안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시적 은유의 항일 리듬을 썼다. 이영지, ‘순응리듬과 항일리듬’ 『시조창작리듬론』(서울: 양문각, 1997)., 277.
 시제 1호를 통해서 그 홀로가 아니라 예수님는 “인자”,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셨다. 시제 1호는 예수님과 더불어 그의 12제자가 그들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공생하는 조건은 더불어 사는 삶이다. 같이 13인으로 일치된 삶의 문제를 13인을 한 덩어리로 하데 그 13인의 덩어리를 두 덩어리로 나눈다.
시제 1호의 2연은 아해 10명중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로 시작한다. 이 첫 자리는 ‘하나’의 뜻이 있고, 통일 창 2:21, 2:24, 4:19.
과 오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단일의 날카로운 사납다 단 2:31; 시 57:4; 사 49:2, 잠 27:17, 겔 21:9.
의 의미를 더 가지어 시적 내포가 10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형재애 개념도 부각시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의 첫 모습을 같이 무서워하는 무리 속에서라는 시적 외연을 넘어서게 한다. 같이 정말로 같이 시작되는 시의 리듬은 제10의 아이까지 아주 일치하게 똑 같은 무리가 된다. 그 같은 모습을 “제1의아해” “제2의아해”… “제10의아해”까지 완벽하게 한무리가 되는 리듬을 탄다.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공생애를 같이하신 예수님의 삶의 한덩어리가 되는 일은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0/10 이 되어 드디어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 이 단결력은 서로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도 힘을 합할 때의 그 온전한 힘이 살아난다. 괴력이 일어나는 일을 이상은 시로써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일차적인 합침은 드디어 통일을 이루면서 합치는 힘이 얼마나 더 큰 힘인지를 시는 보여주고 있다.
왜 13명을 한 무더기의 1연으로 하지 않고 “그중의제일의…”라고 하는 “그중의”라는 한덩이중의 소속개념을 넣어 시를 쓴 이상은 10으로 한 10/10대라는 10명의 하나로 모두 뭉친 한 덩어리를 제시한다. 이 10은 히브리어로도 부하다의 뜻을 지닌 ‘아서라’ 부유해지다: 욥 15:29; 단 11:2, 치부케하다: 창 14:23, 풍부케하다: 겔 27:33, 부하게 하다: 삼상 17:25; 잠 10:4, 윤택케 하다: 시 65:9, 치부하다: 시 49:16, 삼상 17:25, 부: 왕상 3:13, 대하 1:11, 재산, 왕상 10:23, 대하 9:22, 부귀: 대하 17:5, 18:1, 부함: 에 1:4,렘 9:23.
이다. 아서라! 나서지말라!라고 일제에게 엄포를 놓으며 열두제자와 더불어 하나님을 같이 하신 그 분의 이야기가 시 속에 들어가 있다. 열 명 씩 뭉치어 큰 힘을 나타낸 시제1호의 숨은 뜻이다.
시의 외연은 “무섭다고그리오”이지만 바로 부유함이 되는 전부 합쳐진 힘이 한 단계씩 뛰어오름의 수치로 하여 시의 외연과는 전혀 다른 시의 숨은 의미로 반전한다. 무섭고 공포에 떠는 아이들이 아니게 되는 리듬타기는 “무섭다고그리오”의 리듬이 해소되고 있다. 시의 특징은 긴장을 가질수록 잘 된 시가 되는 이 긴박성 “무섭다고그리오”의 긴박성을 오히려 10명이라는 의미지수로 하여 한 마음 한덩어이의 무서운 힘을 과시한다. 하나하나씩 모여서 된 이 리듬은 새로운 아이를 탄생한다. 무서워떠는 모습이 아니라 재잘재잘되는 평소의 아이들로 새로운 힘이다.
이 10명의 아이들은 막다른 골목의 상황아래서도 살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어있다. 시는 보편성을 시의 긴박성의 외연으로 하는 점이 특징이다. 보편성이란 다름 아닌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점을 말한다. 이 아주 보편성이고 보면 극도의 어려움 앞에서 누가 도와주면 금시 힘이 솟아나는 기적이 있게 된다. 더구나 구원의 신이 같이 있는 상황은 삶의 공명 파동리듬을 탔다. 그럼으로 하여 힘이 솟아난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같이 함께 하시는 분에 의해서 이다. 따라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현재의 막다른 골목이 삶의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시 읽기에서도 계속하여 읽다보면 오히려 이 길이 삶의 공간이 된 질주지혜의 시제 1호는 결코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무리의 발자국이 아니게 된다. 만약 죽음을 향한 무리라면 막다른 골목까지 갈 필요가 없는 낙오자가 있어야한다. 꼭 “제10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가 될 필요가 없다. 
목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일어서는 무리 중 하나가 일어나는 의미의 히브리어 에하드 ד󰕗󰔟 םוֹק󰗪(마콤 에하드· 일어서다, 창 1:9).
가 있다. 에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일어선다. 시만이 가질 수 있는 생성생태상황의 열린 시학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로서는 기술문명, 유전공학, 난치병 등의 심각한 상황 바로 무섭다고그리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명의 아이라도 무서운 아이가 있음으로 하여 그 희망의 끈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둘로 늘어나는 한 마음과 한 곳을 향하여 위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가장 바람직한 단체 공동의 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10명으로 구성된 무섭다고 그리오의 아이들만 10명이 구성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10명 인원은 하나의 교회가 설 수 있는 인원수이다. 그리고 10명이 모이어 새벽기도를 할 인원이면 일반적으로 그 교회는 백명이 모이는 교회이다. 그러기에 오감도 시제 1호는 1명이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가는 리듬이 아니다. 단체가 무섭다고 그리오의 아이들이 모일 수 없다. 단체가 모이면 큰 힘이 생기는 것이 이 세계내의 법칙이다. 꽃들도 모이면 군락을 이루고 풀도 모이면 군락을 이루며 단체가 모이는 일은 나쁜 의미로는형성될 수 없는 수치이다. 단체 행동은 무슨일이든지 해 내는 힘을 이 우주는 가지고 있다. 역할을 담당하려 모이어 일어선다.
이상시에서는 두 개의 단체가 형성되어 있다. 바로 첫째 10명과 두 번째 단체 3명의 단체이다. 
또 3명의 덩어리 리듬이 박자를 맞춘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죽음에서 일어서는 무리들의 리듬은 “제1의아해”부터 “제10의아해”까지 뿐만 아니라 “제11의아해”부터 “제13의아해”까지의 집단이다. 드디어 두 개의 큰 집단리듬이 형성된 시의 외연리듬이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의 내포가 더욱 강조되어 있다. 왜 계속 이어지지 아니하고 두 개의 큰 집단리듬을 형성하는가는 성경이 제시하는 2의 리듬이 주는 절대성이어서이다. 사람으로 치면 다시 거듭남이요 우리가 익숙히 아는 둘째 사람 예수에 대한 의미심장한 전달방식의 리듬이다. 이 두 개의 커다란 집단리듬은 한 단계씩 올라가 다져진 한 덩어리의 단체리듬덩어리가 더 하여졌다. 이러한 시의 외연상의 두 집단의 리듬으로 하여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된다. 죽음에서 건져진 아이들의 리듬반복이다. 죽음에서 일어나서! 성경표현대로라면 하마 꿈  םוֹק󰗲󰕘(하마콤·일어서, 창 22:4)
이 일어나서이다. 벌써 꿈이 일어선 웅성거림이다. 웅성거림리듬이다. 갈망의 리듬이며 소리소리 지르는 외침이며 노호하는 아이들이 웅성거림이다. 우리들의 문제에서 삶의 문제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희망하는 그리고 그 희망이 이루어짐에 감격하는 소리! 
이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리듬은 순수하고도 높아 절대자를 감동시키는 주파수이다. 외침리듬이다. 이 큰 집단은 바다의 회오리 물결리듬이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의 호소리듬이다. 하늘로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하늘을 울리고도 남는 땅의 소리리듬이다. 모여진 소리의 큰 리듬은 죽음에서 일어서고 있는 무리의 리듬이다. 큰 힘을 발하여  당연히 일어서게 될 곳 םוֹק󰗲󰕘(하마콤·일어서다, 창 22:14).
의 기적이다.
시의 외연상 “13의아해”까지 갔다. 왜 시의 외연상 “14의아해”가 아닌가! 그것은 시제 3호에서 보여주는 싸움의 승리를 미리 예견하는 의미심장한 리듬이다. 10명은 부하다는 의미인 결코 무서워 떠는 무리가 아니고 더구나 십쌈은 싸움을 이긴 수치이다. 이 시의 내포는 이미 한국인의 독립이 예정된 일제강점기에서의 철저히 시가 지닌 은유로 한국인의 독립을 예견한 선지자적 이상시의 내면구조이다.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래에 독립될 것을 암시하는 죽음을 넘어선 의미리듬이다. 이 의미리듬은 1과 2와 3의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 모이어 어울려 한 단체인 10이 모여 그 싸움을 이김의 승리로 한 바로 우리의 힘 합 10을 합한 3 셋의 싸움이니 당연히 이기는 힘을 말한다. 사四, 죽을 사死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삼三  삼 싸움에서 이기고 삶으로 나아가는 의미, 이 3은 셋이 합하여 10이 세 번 합하여 된 일이다.
성경은 우리 셋이 합하여 사람을 만들자 하였다. 13의 사람들은 만들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 모이어 된 아주 강한 힘을 발하는, 그래서 하나는 쉽게 부러질 수 있으나 셋은 넘어지지 않는 큰 힘을 발휘한 더구나 그냥 3이 아니고 13이다. 10이 더하여진 13이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가치로 이미지화한 후 이상은 시를 차압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의 시의 위치를 곤고히 하고 있다.
 인간 70 아니 24년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살마(나) 나는 그날 나의 자서전에 자필로 부고를 삽입하였다. 이후 나의 육신은 그런 고향에는 있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가 차압당하는 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때문에
- 「1933. 6. 1」에서

이상은 그의 시「1933. 6. 1」에서 시가 차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끄는 길에 서 있다. 예수님을 포함한 13인이 나란하게 줄을 지어 삶의 리듬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두 팀으로 나눈 함께의 길이되 둘로 나누는 시제1호의 2연에서 한 덩어리 10명으로 뭉쳐진 아이들이 한 사람씩 다르게 그러나 한 곳을 향하여 그들의 해야 할 일의 계단을 오르면서 일을 담당한다. 더 나아가 셋의 합한 수가 더 높은 삶의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대한민국 백성들은 늘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른다. 그래서 오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사방팔방이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언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일어섰다. 이 역사는 우연히 얻어진 역사의 기록이 아니다. 언제나 힘겹게 싸워 이긴 역사이다. 무궁화 꽃의 향기로 인내와 은근과 끈기로 일어섰다.
최남선의 「조선 유람가」이다.

한 팔을 남南에 던져 금수삼천리
무궁화 향내 덥힌 대조한반도大朝 韓半島
산아니 놉흐시냐 물이 곱고나
백화가 얽흐러 진 문화의 동산               
- 최남선 「조선 유람가」 최남선 『조선유람』(서울:  동명사, 1947), 6.





2). 동종요법의 무서운 아해

(1). 하나님이 살려준 아해
땅에서 부르짖는 절규는 하늘에서 들어주는 법이다. 절규를 들어주는 이는 절대자 하나님이다. 아해들의 첫 번째 집단의 리듬인 10명의 리듬 안에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의 아해가 들어있어서 해결의 실마리를 열어간다. 이 극적 타결의 리듬은 이미 절대자와 함께한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가 되는 응답의 상승곡이다.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오감도 시제1호의 리듬은 사실 처음부터 무서워떠는 아해리듬이 아니다. 이 시의 내포노출은 이에 대한 실증으로 이미 암시되어진 절대자의 음성이다. 13인 예수님과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어서이다.  막다른 골목에 선 아해들 향해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라고 말씀하시는 자가 있다. 누가 말했겠는가! 그 분이시다. 이 시의 내포가 사실은 시의 내포로 숨어 있었다. 그 증거는 시 문장 전체가 명령체로 되어 있으며 대화를 듣는 아해로 하여금 대화를 받는 사람에게 명령하는 명령문이다. 이 명령자는 절대자이다. 명령자가 “그중에1인의아해가문서운아해라도좋소”라 한다. 텍스트를 통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이다. 이 시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살려주기를 작정한 절대자와 예수님과 무서워하는 아해들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이 시의 아이러니는 아이들은 무서움을 모른다. 사리판단을 잘 할 줄 모르지만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으면 그중에 1인의 아이가 무서운아이가 된다. 절대자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문서운아해라도좋소”라 하신다. 이 단호한 명령 절대자의 힘을 믿는 힘으로 겁날 것이 없어진다. 절대사랑이 내재한 “무서운아해”가 된다. 우리말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변화의 자리는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세처럼 막다른 골목에서 전능자를 소망하는 사역자의 모습이다.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는 자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어떠한 절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이 그러하였고 스테반이 그러하였다. 텍스트에서 본 이미 뭉쳐진 리듬자리는 한 사람의 시작으로 하여 뭉쳐지고 다져졌기에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절대적이고 부유하고 완전하고 무서운 아해들이 이미 되어있다. 시로 보면 리듬자리이다. 상승곡이다.  “무서운아해”는 시의 외연리듬인 4연에서 드디어 들어난 뭉쳐지고 뭉쳐져 합하여지는 3연의 많은 한국인 전체가 들어난 시의 내포리듬이다.
그러기에 4연에서 명령자는 아주 여유롭게 2행에서 무서워하는아해가 겨우 2명임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다시 줄어서 겨우 1명임을 알려준다. 

그중의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이제 무서워하는 아해는 2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이다. “무서워하는아해”는 드디어 아주 없어질 것이 예측되어지는 시적 질서의 자연스러운 수치의 연속에서 2→1→0이 될 것이다. 아주 없어진 것이다. 반대로 무서운아해는 점점 불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 그들의 아름다운 나날을 영위하는 권리와 자유를 누리게 됨을 시의 니포로 한다. 인간들은 죽음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살려줄 하나님을 찾아 살아남아 이 땅에서 풍요와 안정의 축복을 누리며 산다. 이 동종요법 Ibid 99.
은 우리들의 현실가운데서도 같다. 우리들의 삶에서도 같다. 성경의 마가의 다락방 합심기도는 옥에 갇힌 바울을 나오게 하였다. 거대한 기도로 일어섰다. 이 확신의 믿음자리에 있는 이들은 인간에게서 그 해답을 얻기를 거부한다. 오직 막다른 골목에서 하늘을 울리며 얻는 믿음! 그러기에 메마르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땅 창 1:9.
에서 일어섰다.
이상시의 시적 가치는 이상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어려움에서 하나님을 찾는 결과로 얻어진 해답을 시의 내포로 한다.+ 기독교 믿음의 시가 되게 한다. 참 삶은 믿음안에서만 가능하다. 시의 참 가치는 시의 외연리듬이 내포성의 리듬으로 인하여 시적 거리를 해소할 때이다. 그것은 바로 “아해”가 무서워함이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아해”로서의 뚜렷한 상을 가지는 구원의 문학이 되게 한다. 하나님이 살려준 아이의 예는 성경에서 다윗이다. 양치기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라는 믿음으로 적군 골리앗에게 나아간다. 그는 말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검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즉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불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게”하리라 하였다. 이상은 그의 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임을 그리고 이기는 일은 칼과 검에 있지 아니함을 시로 공포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였다.



(2). 뚫린골목의 흥이 나는 감동리듬
다윗이 행보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멧돌을 던져 불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게 삼상 17:34∼50.
 하는 무서운 아이들! 우리들의 유관순이, 이순신이 나라를 구하는 무서운 아이들이 시제 1호의 아이들이다.
뚫린골목에서의 아해들은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의 명령을 받는다.

(길은뜷린골목이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 시의 존재에 대한 유추 이영지, 『시조창작리듬론』에서.
는 인간과 예수와의 차이를 식별하고 있는 시이다. 인간유형의 어떤 영웅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함께로서만 가능한 시이고 그 방법으로 인성으로 표출된 구조로 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시적 내포로 한다. 카톨릭에서 예수를 어린아이로 표시하고 있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공동의 생명체 13인이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그가 살고 있는 우르 땅을 알고 그곳을 떠날 때 갈 곳을 모르고 일어섰다. 기독교인들은 암울한 일제하에서 36년간의 긴 시간을 벗어나며 죽음을 이기고 일어섰다. 명령에 의해 참 자유자 이스라엘은 생명을 보존 받는 참 자유자가 되었다.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야곱 이스라엘이다. 밤새도록 기도하는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한다면 이 시제1호가 갖는 반복의 리듬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제1호는 읽으면서 자극을 받고 또 읽으면서 얻어지는 홍문표, 『시창작의 원리』(서울: 창조문학사, 2004., 400∼413.
 리듬의 신통력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동의 힘이 되어 솟구치는 신이 부여한 생태리듬이다.
아해의 태어남은 신의 절대영역의 신비의 리듬이다. 이 신비는 아해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의 자유로움의 리듬이다. 막히지 않는 “뜷린골목”이다. 우리들이 아이같이 순수하여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시제 1호는 아이들에 관한 시이다. 아이드른 보호자와 같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같이 있게 되는 아이들은 보호자와 같이 있어서 순수와 깨끗함과 온전한 자리에서 그 힘을 얻는다. 이들에게는 공포가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시제 1호는 처음부터 메타의 시이다. 죽음 앞에서도 “무섭다고그리오” 함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무섭다고그리오”를 설정하고 시제1호가 메타포 은유의 시임을 천명한다. 이 숨겨진 천기는 바로 아이가 아주 귀중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시이다. 이 아이가 예수님이라는 의미의 확대까지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 존재의 의미리듬은 세상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모습이 부각되는 절대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시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이상시 오감도 시제1호는 심층생태학들로 자유로움의 리듬이다. 이 시적 은유는 개체들과 공동체들, 자연과 만물사이의 새로운 균형과 조화를 모색하는 리듬이다. “막다른골목”의 아해들이 “뚫린골목”에 서게 되는 물 흐르듯이 흐르는 리듬이다. 이 세상에 모습인 불안과 죽음직전에 직면한 절규와 목숨조차 유지할 수 없는 당시의 일제 상황인 생성불가능의 자리에서 그와는 전혀 다른 절대자의 권능이 내재하는 은유리듬이 이 시에는 있다. 이 가능성은 문학스토리에서 전개되는 리듬으로 영웅주기의 리듬 영웅신화를 주기로 본 라딘박사는 트리스터 주기, 토끼주기, 붉은 뿔 주기와 쌍둥이 주기로 표현하였다.
이다. 신화적 주인공의 시인 이상이 쓴 시의 리듬이다.

13인의아해라가도로로질주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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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아해는문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오.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따라서 텍스트 순서에 의한 시적 내포 암시리듬은 텍스트라인이 유일한 구체성을 지닌 객관 사물어 “아해”를 통해 “무서워하는아해”와 “무서운아해”로 연결리듬을 한다. 이 긴장리듬은 그 해소리듬의 “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의 한쪽 리듬을 배치하고 자연 생성되는 리듬을 얻게 한다. 바로 시제 1호의 생성리듬이 특이한 괄호를 넣어 시행으로서의 구성을 세 번으로 한정하여 우주적 질서의 리듬으로 시적 긴장도가 존재하게 하고 있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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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오)
        ↓
(길은뚫린골목이정당하오)

“무서운아해”와의 유기적 리듬은 막다른골목에서 다른사정을 제치고 “뚫린골목이적당하오”로 만든다.
뚫린골목이라고 혼자만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아가 왕성하여야 이 뚫린 골목을 유지할 수 있으며 더욱 자신을 조심스럽게 잘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참 자유가 주어지면 오히려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치밀한 자신을 위한 계획과 미래를 향한 발돋움을 위해 노력한다. 이 노력이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시제 1호이다.




2. 한 방울의 피를 모아 살아나는 생명리듬
 

그러기이 이 개개인의 참자유자에게 주어진 한 방울의 참 피가 필요하다. 시제 1호를 통사성에 따른 외연으로 본다면 이 시는 아해들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즉 피가 말라가는 리듬으로 출발한다. 피가 점점 모자라져가는 죽음의 형상에서 한 사람의 한 방울의 피라도 모은다. 한 아해, 두 아해의 피를 모아 삶을 만들어간다. 왜냐하면 반복리듬이기 때문이다. 에스겔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리듬이다. 삶의 생성리듬은 아해들의 죽음을 위한 질주리듬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삶을 지향한다. 그 이유는 시어 “아해”가 26회나 사용된다. 이 26은 절대자 여호와의 히브리어적 수치로도 연결된다.
ה ו ה י(ה󰕯ה󰖾) 5 + 6 + 5 + 10=26이다. 이토록 중요한 이싱시 시제 1호의 발견은 아이의 문제가 바로 절대자의 문제가 되는 시이다. 이 세상의 진리로도 아이는 죽을 날 보다 살날이 더 많다. 시제 1호의 가치가 부여되는 아이의 중요함이다. 강렬한 징소리로 “막다른골목”을 “뚫린골목”으로 만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아해”는 예수그리스도를 지표 한다. 십자가 앞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인 예수님 그러나 깊은 기도에서 일어서 이기시고 “다 이루었다” 요 19:30.
라 하신 부활하여 생명을 얻는 리듬이다. 일제강점의 광야에서 한국인이 일어선 리듬이다. 이 리듬은 여럿이 기도하는 부르짖음이 이루어진 일이다. 이 기도로 참 목숨이 살려졌으며 그 결과가 다 이루어진 일이다.
시제 1호는 무서운 사람들의 시이다. 이 무서운 사람들 하나는 아브라함이다. 그는 100세에 아들을 얻고 그를 너무 애지중지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고 있자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린다.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외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모리아 산으로 간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한 산 거기에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려 창 22:2.
 한 무서운 사람 리듬에 선다. 또한 요셉도 무서운 사람의 리듬을 가진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의 신하 애굽 사람 시위대장의 집에서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된다. 사실 요셉은 가정 총무가 되었으나 시위대장의 아내로 유혹을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옥에 갇힌다. 이때의 요셉도 무서운 사람의 리듬에 선다. 창 39:1∼23.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도 풀무 불에 들어가는 무서운 사람의 리듬이 되는데 이는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죄목 때문이지만 풀부 불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천사가 그를 도우는 까닭으로 하여 그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천사가  뒤 따라 같이 보호한다. 이 보호하심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무서운 사람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개인적인 일에 얽매일지 않고 절대자의 뜻에 순종하여 절대자를 절대자로 섬기는 데서이다.  큰 힘이 생기는 무서운 사람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혼자가 아니라 같이 힘을 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무서운 사람은 나라를 움직이며 세계를 움직이며 주위를 움직인다. 그러기에 한국에서는 단합대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봄이래서 단합대회 여름이래서 단합대회 모이어서 즐기며 그 뜻을 다짐한다. 이 군중의 힘은 잘못된 법을 고치며 잘못된 관행을 고친다. 그러기에 이 단합의 힘을 모으기 위해 일정한 뜻을 적고 같이 싸인을 하여 이 증거로 어떤 일을 해결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흥이 많아 모이어 즐겁게 노래 부르며 마음의 든든함을 가진다. 이 힘은 바로 한국이 이제까지 그 절절한 사연들을 뒤로 하고 단일민족으로 5천년이도록 이어오는 원천이 된다. 우리말에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다. 조금씩 모아 큰 힘을 발휘하는 한국의 좋은 풍습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의 침략 등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는 무서운 피를 물려받았다. 오천년 이상으로 나라가 이어지는 혈통을 가진 단일민족의 피! 이 무서운 우리들의 피 리듬은 혈통으로 계속 이어진다. 바로 한국시인 이상이 쓴 시제1호에서의 피의 리듬이다. 죽음의 골짜기에 있던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기적의 리듬처럼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아들을 얻을 수 있는 피의 리듬처럼 불가능에서 가능이 되는 이 피는 절대의 사역을 소망하는 데에서만 이루어진다. 이 간절한 전능자를 사모하는 리듬은 죽어서야 싹이 나는 리듬이다. 시제 1호에서의 생명체의 싹 ב󰙸󰘡(에세브·싹, 창 2:5; 출 9:25; 신 32:2; 시 106:20; 잠 19:12; 미 5:7; 슥 10:1).
 아해들은 그들의 막힌 골목을 열어 열린 골목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어낸다. 󰘨יר󰖅󰗫(마즈리아·열매맺는, 창 21:12, 49:24; 출 16:31; 신 5:15; 레 11:37; 대상 4:3; 렘 4:3 31:29; 시97:1, 105:9∼19, 126:5; 사 19:7; 잠 22:8; 단 1:12; 호 1:4).
 
이 장한 이들에게 있는 아주 작은 싹에는 물의 입자가 있다. 이 물의 입자는 죽은 물이 아닌 산  물이다. 아름다운 육각형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몸 안에 이 싹 물을 소유하여야 살아 움직이는 리듬선 에모트 마사루, 양억관 옮김 『물은 답을 알고 있다』(서울: 나무심는 사람, 2004)참조.
다. 이 생명의 입자들은 육각형이고 이 육각형들이 모여서 된 이 결정체는 너무나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른 뼈 속에 아직도 있는 물기이다. 이 물기가 살기를 희망하는 작은 물의 입자이다. 아벨이 그러하며 마른골짜기 뼈들이 그러하다.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나아가는 “뚫린골목”이 되는 거대한 기적은 이 물의 입자들을 하나님이 살린데 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리듬이다. 대한민국이 독립되는 리듬이다. 이 살아있는 피의 싹이 시의 내포이다. 시가 살아 있어야 사람이 살아 일어선다. 살아나 지혜의 시인이 되고 지혜의 시인에게는 늘 삶의 시의 리듬이 있다. 시로써 애국하는 이상에 의해 나라는 살려진 것이다. 이상의 시 속에는 무서운 아해의 피가 살아있다. 싹은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는다. 이상의 시 「오감도」 시제 1호가 제시하는 살아나는 뼈는 하나에서 둘 그리고 셋으로 차근차근 늘어나면서 생명의 피가 강력무리들의 리듬이 된다. 이 피는 작가의 작품창작 당시의 상황인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의 피와 살이다. 첫싹 “무섭다고그리오”의 츨빌 리듬으로 하여 거목이 된 아해리듬이다. 이 아해는 막다른 골목에서 피의 우렁찬 박동소리로 하늘을 뚫으며 뚫린 골목까지 간다. 이 거대한 폭의 리듬은 시의 내재리듬이다. 현재를 초월하는 “꿇린골목”으로 나아가 열린 세계를 만드는 리듬이다. 이 거대한 꿈은 우주로 뻗어 말씀에 복종하는 생성의 자리에 선다. 이 탈바꿈의 변환성 리듬은 모세가 광야에서 탈바꿈하여 요단강의 물을 건넜다. 그 2세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탈바꿈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싹을 낸다. 가나안에서 싹이나 장성하기까지 어려움을 겪지만 다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무서운아해”들! 싹이 나지 않는 리듬들은 사울처럼 처절하게 죽어가는 리듬이며 싹이 났다하더라도 불필요한 사랑을 하였을 때 이스라엘멸망의 리듬이다.
시제 1호는 “무서운아해”의 시이다.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의 확대개념과 월드컵대회에서 무서운 아이들이 보여주었던 그 실 경험과 막다른 골목에서 변신하는 홍문표, ‘생태학과 시’ 창조문학(서울: 창조문학사, 2000).
 무서운 아이의 시이다. 이 무서워하는 아해가 무서운 아해가 되는 시기는 합치어서 단결할 때 생성되는 힘이다. 잎도 그러하다 차츰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된다. 물론 이 무한의 생성성은 순서들의 집합 1, 2, 3… 1, 2, 3은 W+3으로 나타낼 수 있다.  모든 무서운 아이들의 집합 1, 2, 3…W의 서수를 가진다. 1, 2, 3…의 한국인들 전부를 합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한국인의 모든 참여인 무서운 아해는 대한민국을 구하고도 남는다. 무서운 아해의 확대는 특별한 힘을 생성하여 뭇사람이 주시하는 영웅리듬이 된다. 한 세계를 뭉치는 힘은 세계를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화하는 작업의 생성리듬이다. 이상시가 추구하는 시의 내포이다.
무서운 힘의 생성은 믿음에 있다. 바로 지금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합할 때, 늘 함께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 심리리듬은 하나씩 합하여 지면서 이 힘은 사람만의 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합하여진다는 믿음 힘이다. 믿음이 서는 순간 생성되는 하나님의 힘이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와 열두 사도와 열두 지방이 그리고 열두 샤제가 모이어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13인일 때 그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의 시이다. 동시에 내가 남을 헤치지 않고 하나님께 나를 기대는 때 시제 1호는 반복과 수리의 서열에 의한 한 사람의 무서운아해를 탄생시키고 이 아해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무한한 사람의 서로 기대임으로 하며 무서운 힘을 만들어 내는 생성리듬이다.
그것은 무서워하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시로 빛의 존재를 깨닫는 시간이다. 이 존재의 영속성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그대로 본받으려 하는 때에 힘을 얻는다. 빛의 존재역할일 대이다. 옛 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되어 앞으로 존재할 역사 위에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더불어서 힘을 같이 합했을 때 생겨난다. 이 시는 청산의 시이다. 늘 푸른 청산과 사람과 어울어짐을 쓴 시다. 마음의 푸르름과 자연의 푸르름이 합하여 녹색지대를 형성하고 이러한 뜻을 가진 사람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시이다 .하나님을 믿는 위대한 정신력으로 해결한 특별한 존재의 시이다. 생각이 없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머리를 가지고 있고 현대인들이 쓰는 자아의 시이다.

이상의 「오감도」 시제 1호의 시는 기독교 적 관점으로서의 연구가 가능하다. 이상은 실제 「육친」이나 「얼마안되는 변해」에서 ‘그리스트’, ‘기독교 순사’ 등의 기독교 시어를 사용하였고 또 저항시를 썼다. 이영지, 『시조창작리듬론』
 이런 점에서 시제1호도 기독교 관점이 용이하게 된다. 아해들 13인은 열두제자와 예수님과이다. 아해와 아이는 시적 동의어다. 성서 속 아이들은 천국을 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이상시 시제1호는 긍정적인 기독교 관점으로 보았다. 막다른 골목이라도 텍스트시어로 인하여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절대자를 찾기에 접근이 가능했다. 12제자와 예수님이 함께한 13인이 살아남은 일은 이미 예수님이라는 보호자가 있음으로 하여 가능함을 암시한다. 일반적인 보편성의 12에서 12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이 시는 아이 즉 사고의 능력이 잘 자라지 못한 철저한 불가능의 영역을 가능의 영역으로 바꾼다.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아이를 성경은 제시한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죽는 문제가 아니라 사는 문제이다. 어떠한 막다른 골목이라도 예수님이 함께하는 아이들은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 이 천국은 죽어서 가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천국을 말한다. 좋은 나라 좋은 가정 좋은 직장이 천국이 될 수 있어서이다.
예수님이 함께한 13명은 통일리듬이다. 이 합은 새로운 뭉침의 합하여 1호의 무리라는 설정을 성경적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10명으로 묶고 나머지 3명을 다시 한 모임으로 형성하여 두 개의 단체를 만들어 그토록 강조하는 성경의 특징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온전히 너가 내가 합하여 이루어 내는 합일리듬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절대자를 감동시키는 주파수가 된 외침리듬이다. 이러한 동종요법은 하나님이 살려준 아이들만 살아나는 성경적 기법으로 하늘을 울리는 소리로 전능자를 간절히 사모하여 얻어지는 리듬이다. 이제 뚫린 골목에서 흥이 나는 감동 리듬 시다. 시가 가지는 은유란 히브리어로 임마누엘 뜻이 되는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존재라는 뜻인 동시에 뜻이 아이같이 순수할 때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이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미의 시적 조건리듬이다.
시제 1호는 아이들의 시이다. 아이들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 무서운 아이들은 절대자의 뜻에 순종하여 절대자를 절대자로 섬기는 피 리듬이어서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한국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찬기파랑가」의 기파랑이 그러하였고 화랑들이 그러하였으며 3·1운동의 순국선열이 그러하였다. 윤봉길이며 유관순이며 모두 한국역사를 이어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시인의 피가 살아 시의 내포가 된다. 이 상의 시 속에는 무서운 아이의 피가 살아있다. 무서운 아이의 시이다. 이상시오감도의 시제 1호는 한국인에 대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