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시의 춤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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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시의 춤추기

에덴시인 시의 춤추기
– 홍문표의 에덴 시학연구 3
이 영 지



1. 에덴시인 홍문표

평생을 에덴시학으로 일관해온 홍문표 교수는 시에 있어서도 평생 에덴에 관한 시를 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홍문표 교수를 에덴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에덴시인은 그의 시집 『십자가 십자가』에서도 십자가와 사랑을 등가성으로 사랑의 십자가를 드러냄으로써 에덴시인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십자가의 선입관적인 어렵고 괴롭고 처절한 십자가의 인식을 오히려 사랑을 완성하는 에덴의 세계, 바로 주님과 우리가 함께 낙원에 이르는 삶으로 승화하여 행복한 춤추기의 시적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2. 십자가와 서정적 에덴시인

삶과 시를 동일시한 에덴시인은 『십자가 십자가』시집에서 시 제목으로「배반의 십자가」「오판의 십자가」「죄인의 십자가」「어린양의 십자가」「영광의 십자가」「네거리의 십자가」로 십자가를 6회 반복한다. 바로 예수의 제자적 삶을 살려는 의지적인 시 덩어리로 하여 에덴시인임을 천명한다. 더 나아가 에덴시인이 결정적 서정 시인이 되게 하는 이유는 ‘십자가’와 ‘사랑한다는 것’을 등가성으로 하는데 있다. 기독교 시인에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이 십자가는 사랑한다는 것이어야 함을 들어내는『십자가 십자가』시집은 제 1부 제목조차 ‘십자가 십자가’로 십자가를 2회 리듬으로 하면서 성경이 지닌 황금비율 리듬에 합류한다.
특히 가상칠언의 십자가 시들은 ‘십자가 일곱 마디’를 7회 반복리듬으로 하여 이 세계의 황금비율이자 신성수가 되고 있어 사랑의 기독교를 분명히 하는 서정적 에덴시인이 된다.
그 첫 번째는「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일곱 마디 하나」이다.

믿었던 제자는
은 삼십에 스승을 팔고
수제자는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 하고
백성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한다

비웃고
욕하고
채찍질하고

머리엔 가시관
생살엔 무쇠 대못
꽝꽝 내리친다
창으로는 옆구리를 찔러
생피를 뽑는다

그런데도 당신의 간절한 목소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원수를 사하시고
십자가로 우리 목숨 살리시는 당신
당신은 정말 사람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 십자가 일곱 마디 하나」

일곱 마디 하나에서 주제시어는 십자가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에덴시인의 차이는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시는데 에덴시인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라 한다. 이 정반대 리듬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로 다시 반복하여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십자가를 지신분과 에덴시인의 엄격한 차이를 사랑의 절대성으로 한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한 간곡한 절대 거절 할 수 없는 말씀과 인간 에덴시인의 현실 감각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로 세 번째 정반대리듬으로 한다.
그러기에 에덴시인은 인간본성으로 겸허히 엎드리며 원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우리 목숨 살리시는 당신에게 절절한 예수님 바라기 에덴시인이 된다. 예수님 바라기의 에덴시인은 십자가상에서의 죄인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라는 믿음을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예수님 바라기 일곱째 마디 둘의 시를 탄생시킨다.

십자가는 저주의 길
죽음의 길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겐 영생의 길
당신과 함께라면
죄인도 낙원으로 가는 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죄 값은 이마에 인을 치는 것
가슴에 빨간 주홍 글씨 매어 다는 것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문신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죽어서 낙원이 확실하다면
모진 십자가도 영광이겠지만
그러나 당신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죽어 가는 자가 죽어 가는 자를 살리는
당신의 놀라운 역설
당신의 거룩한 자비가
오늘도 태양처럼 눈이 부시네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 십자가 일곱 마디 둘」

에덴시인은 일곱 마디 하나에서 둘 서열 이어짐으로 하여 연작적 십자가 시어를 반복한다. 이 반복리듬은 십자가로 하여 그 분과 더불어 나도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반복한다. 예수님 바라기의 에덴시인은 이 때문에 에덴 시를 쓰는 축복의 에덴시인이 되어 에덴시인의 시적 삶이 단연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들어가기까지 하는 기쁨의 무기가 된다.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낙원에 들어가는 길이다. 감히 외람되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다가가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하는 마음의 간절함을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으며 비록 “가슴에 빨간 주홍 글씨 매어 다는 삶”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한마디에 에덴시인은 “당신의 거룩한 자비가 오늘도 태양처럼 눈이 부시네요” 에덴시로 한다. 태양리에 태어난 에덴시인의 시적인 삶이 우러나오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이야기로 일관하는 에덴시인의 시는 엄마와 아들을 통한 시적 뛰어넘기이다. 에덴시인은「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십자가 일곱 마디 셋」으로 한다.
 
엄마
바다
엄마의 바다
그런데 엄마는 여자다
그러기에 당신의 엄마는 늘
여자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아들의 애절한 절규를 들으며
그 피 흘림의 발목을 잡고
할딱거리는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는
엄마
바다
여자
성모 마리아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바다도 울고
엄마도 울고
여자도 울고
아들도 울고

엄마
바다
엄마의 바다
그런데 엄마는 여자다
그러기에 당신의 엄마는
늘 여자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

- 십자가 일곱 마디 셋

에덴시인은 ‘어머니’를 시에서 ‘어머니’도 아니고 ‘어머님’도 아닌 ‘엄마’로 한다. 에덴시인은 예수님과 예수님 엄마를 시적 동일시로 한다. 에덴시인은 “엄마”를 부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농축된 장면 서로 울며 바라보았을 울음의 장면을 시의 특징적 은유로 한다. 울음이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시의 특징 울음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시적 긴장이 에덴시인에게 다가와 사람인 에덴시인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보편성의 처절한 몸부림을 시적 은유의 등가성으로 한다. 이 아픔 나누기는 오히려 가벼운 날개를 달고 에덴시인을 향해 아픔을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황금진리의 날개가 된다.
바로 사람 예수님의 울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일곱 마디 넷」그것이다.

육시에서 구시까지
하늘은 빛을 잃고
대지는 흑암의 발밑에서 떨었습니다
배신과 비웃음의 무지가
메시아를 못 박고
피도 눈물도 모두 삼켜버린
십자가의 모진 언덕

피도 마르고
눈물도 마르고
목숨도 마르고
죽음에서 주검으로 넘어가는
당신의 절망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애절한 외마디가
골고다 하늘을 갈가리 찢고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대지만
아버지는 끝내 하늘에 계실 뿐

한번 뿐인 목숨은
아들에게도 하늘같은 것

그러나 아들이 죽어야 우리가 살고
아들이 죽어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아들의 목숨이여
외마디여
측은함이여
저 아득한 외로움이여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 십자가 일곱 마디 넷」

물리적으로 이 지상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그리하여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지상 자연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덴시인에게 보여 지는 육시에서 구시까지 하늘은 빛을 잃고 대지가 어두워진다. 이 자연현상을 에덴시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동일리듬으로 한다. 이 2회 황금비율 사슬 리듬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이어진다. 그러나 에덴시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우리가 살고 아들이 죽어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처절하고 냉혹한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홍시인의 에덴시적 십자가의 외연과 내포다.
한편 현실 수용이기도 한 이 시의 외연은 예수님의 말씀 “내가 목마르다”로 연결된다. 그러나 지극히 인간 모습 그대로 에덴시인이 절감하는 시의 리듬은 “목마르다니요”의 시어화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그 고난의 십자가를 비낄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는데
목마르다니요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셨는데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쯤
내리실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겨우 한 길 높이
마음만 먹으면 내려오실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피를 쏟고
물을 쏟고
남은 것은 마지막 죽음의 문턱
물 한 모금 축일 수 없는 땡 볕의 허공에서
사막처럼 타고 있는 육신의 외마디

“내가 목마르다”

내장까지 타버린 당신의 목쉰 절규가
지금도 내 골수를 후비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 십자가 일곱 마디 다섯」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가장 우리 인간을 아껴주시는 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는 사람의 자아선택 부분이 있다. 에덴시인은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그 고난의 십자가를 비낄 수도 있었다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 “목마르다”를 ‘니요’로 덧붙여 “목마르다니요”로 시어화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는데 “목마르다니요”를 에덴시인은 2회 리듬으로 한다.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셨는데 “목마르다니요”로 다시 리듬화한다. 이러한 ‘목마르다니요’의 시 리듬은 배신자들이 만들어 놓은 십자가여서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로 4회 까지 에덴시인의 리듬으로 한다. 그리고는 ‘사막처럼 타고’와 “내가 목마르다”를 등가리듬으로 놓는다. 이 리듬으로 하여 에덴시인은 “내장까지 타버린 당신의 목쉰 절규가/ 지금도 내 골수를 후비고 있습니다“로 한없는 인간적 연민을 보낸다. 
에덴시인은 다섯째 날에 사용하였던 “목쉰 절규”를 다시 여섯째 날의「다 이루었다 - 십자가 일곱 마디 여섯」시에서 반복리듬으로 한다.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했는데
망우리 무덤마다
이승의 한들이
밤이면 원통한 별이 되어
허공을 떠돌고 있는데

저 아슬한 십자가에 매달려
증오와 무지의 창끝에 사지는 찢기우고
아버지를 부르는 목쉰 절규마저
허공 속에 잠긴 하늘
빛을 잃은 세상은
온통 캄캄한 밤 길이온데

다 이루었다니요

그건 오직 전능자의 유일한 문자
그 처절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요

태초부터 우주의 끝자락까지
생로병사의 애절한 골짜기에서
타락과 심판의 언덕배기까지
억매임에서 자유의 새하얀 봉우리까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요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네요
천지가 진동하고 있네요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네요

이제 주검들의 무덤에는
진달래꽃이 피고
한 맺힌 천 년의 침묵들이
노랑나비 되어
부활의 아침을 훨훨 날아 오르겠네요
- 「다 이루었다 요 19:30.
 - 십자가 일곱 마디  여섯」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목쉰 절규와 상응되는 “다 이루었다” 리듬을  에덴시인은 “다 이루었다니요”의 에덴시인만의 “...니요” 시어로 리듬 화하여 “그 처절한 십자가”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요”를 반복리듬으로 한다. 
 
태초의 우주의 끝자락까지
생로병사의 애절한 골짜기에서
타락과 심판의 언덕배기까지
억매임에서 자유의 새하얀 봉우리까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요
- 「다 이루었다 요 19:30.
 - 십자가 일곱 마디  여섯」에서

“다 이루었다”의 예수님 말씀의 순간을 기점으로 에덴시인의 가슴에는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 바로 에덴시인이 그토록 바라던 에덴의 세계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네요

이제 주검들의 무덤에는
진달래 꽃이 피고
한 맺힌 천 년의 침묵들이
노랑 나비 되어
부활의 아침을 훨훨 날아  오르겠네요
- 「다 이루었다 요 19:30.
 - 십자가 일곱 마디  여섯」에서

에덴시인의 시 어휘의 끝에 “...니요“와 ‘네요”의 입천장 자음을 반복리듬으로 하는 특이한 확인 리듬은 “주검들의 무덤”과 “진달래 꽃” 대립리듬이다. “천 년의 침묵”과 “노랑나비” 대립리듬과 “부활의 아침”과 “훨훨 날아 오르겠네요”의 동일 리듬으로 철저히 시의 본성인 의미리듬 법을 에덴시인은 즐겨 쓴다. 
에덴시인은「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 십자가 일곱 마디 일곱」으로 에덴시인 가슴에 날개를 단다.

이승의 시간도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소망의 문자를 새겨 봅니다
낮에는 욕망의 꽃씨를 뿌리고
밤이면 단란한 가족
육신의 둥지도 더듬어 봅니다
나에겐 이름 석 자도 있고
소유의 목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은 지고
캄캄한 밤길
지상의 벼랑 끝에 매어 달린
내 오른손의 마지막 떨림

그 때 나는 무엇을 움켜잡을 수 있을까요

지상의 허물을 벗고
그 끈질긴 영욕마저 바람 되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될 때

그 때 나는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늘나라 꽃밭을 기다리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 믿음인가
저승길에서도 나와 동행할 수 있는
내 영혼의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버지여 내 어리석은 영혼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십자가 일곱 마디 일곱」

에덴시인에게 부여되는 “내 오른손의 마지막 떨림”으로 오는 그 때 에덴시인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할 수 있는 하늘나라 꽃밭, 즉 에덴을 기다리는 영혼이 될 수 있음에 “행복한 믿음”의 에덴시인이 된다.

이제 에덴 시인에게 “십자가”는 그 분으로 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활활 타오른다. 믿음의 하늘 오름으로 하여 온 땅에 가득한 영광의 십자가를 지닌 에덴시인의 삶이 전개된다. 어디에서나 십자가의 복된 소식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가나안의 꽃밭을 에덴시인은 느낀다.


3. 에덴시인 시의 춤추기

에덴시인의 시는 춤추기의 시다. 이 춤추기는 수평적 춤추기가 아니라 수직적 춤추기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닮고 싶어 ‘나도’라고 하는 시적 동일화의 꿈꾸기에서이다. 

가장 낮은 데로 오셔서
가장 높은 곳으로
내 손을 잡아 주시는
당신의 의로운 오른손
나도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
내 부끄러운 이름 석 자
강물에 던지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감람나무 언덕길 자국마다
얼룩진 땀방울
마지막 핏방울마저
땡볕 허공에 뿌리신
당신의 뜨거운 눈물
나도 진달래꽃이 되어
백합꽃 향기가 되어
팔월의 나팔꽃이 되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외로울 땐 친구가 되시고
슬플 땐 노래가 되시고
어두울 땐 등불이 되시는
나의 영원한 당신
나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노래가 되고
등불이 되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에서

수직으로 된 시적 동일화는 “가장 낮은 데로 오셔서/ 가장 높은 곳으로/ 내 손을 잡아 주시는/ 당신의 의로운 오른손/ 나도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에서이다. 에덴시인 시의 진동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의 몸짓이다. “발밑에 엎드려=내 부끄러운 이름 석 자/ 강물에 던지고=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의 이 1연 진동리듬은 “당신의 뜨거운 눈물=나도 진달래꽃이 되어=백합꽃 향기가 되어=팔월의 나팔꽃이 되어=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의 2연에서도 등가리듬이다. 3연에서도 “외로울 땐 친구가 되시고=슬플 땐 노래가 되시고=어두울 땐 등불이 되시는=나의 영원한 당신=나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노래가 되고=등불이 되어=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등가리듬이다. 
이처럼 절대자와 인간의 거리는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감히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라며 3회 리듬으로 춤을 춘다. “나도 진달래꽃이 되어/ 백합꽃 향기가 되어/ 팔월의 나팔꽃이 되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소서”이다. 주님의 ‘눈물’에 ‘나팔꽃’과 ‘진달래꽃’과 ‘백합꽃’으로 춤추는 시인이다. 감히 ‘친구’가 되시어 ‘노래’가 “등불”이 되시기에 에덴시인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노래”가 되고 “등불”이 되어 당신을 ‘사랑한다’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점점 더 높은 높이의 시로 춤을 춘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기에 당신의 눈부신 꽃밭에서 내 슬픈 영혼도 ‘하얀 나비’ ‘노란 나비’ ‘호랑나비’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춘다. 당신께서는 베옷을 입으시며 에덴시인에게 기쁨의 띠 옷을 입히신다. 내 헐어진 영혼에 색동옷으로 때때옷을 입히시고 은총의 띠로 주시니 지화자 장단으로 덩실덩실 춤추게 하신다.
그 분은 에덴시인의 남루한 삶의 습성인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게 하시고 죽음을 부활로 보여주시며 가난한 노래를 에덴의 시로 주심에 에덴시인이 된다. 그러기에 소고치고 장구치고 할렐루야 지화자 좋다하는 에덴시인이 된다. 모두에게 이 즐거움과 기쁨을 전하려 에덴시인 시의 춤추기가 된다. 혼자가 아닌 같이 에덴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같이 가기를 소망하며 춤춘다.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소서
앞만 보고 가게 하소서
낮에는 서편 하늘의
구름기둥만을 보게 하시고
밤에는 당신의 불기둥
베들레헴 하늘에 빛나는
별만 보고 가게 하소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소서
당신만을 따라 가게 하소서
말씀의 발자국을 따라 가게 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새하얀 꽃길로
화사한 사월의 언덕길도
따라 가게 하소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소서
눈물 골짜기도 가게 하소서
사하라사막을 지나
아라비아사막으로 가게하시고
홍해를 지나 광야 40년을 가게 하시고
홀로이 캄캄한 밤길을 지나
여리고성의 새벽길도 가게 하소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소서
밤마다 꿈꾸며 가게 하소서
강가엔 사철 꽃들이 휘드러지고
생명나무 숲에는 노루 사슴
새들이 지저귀는 곳
당신과 함께 모두가 춤추며 노래하며
시로 화답하는 나라
그런 꿈을 꾸며 가게 하소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소서」 홍문표, ‘예루살렘과 순례자의 시’-시 84:1-7‘(서울: 동천아카데미, 2015.4.12.)설교중 발표된 시.
에서

시가 지닌 긴장관계인 목적지는 1연에서 ‘서편 하늘’ ‘구름기둥’ ‘베들레헴’ ‘불기둥’ ‘별’ ‘예루살렘’ ‘십자가’ ‘부활’ ‘화사한 언덕길’이다. 그런데 가는 방향과 방법은 말씀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십자가와 부활의 새하얀 꽃길이다. 따라서 수직과 수평이 합하여져서 십자가가 형성되는 에덴시인의 시다. 시가 지닌 특징 반복리듬은 2연과 3연에서도 거듭된다. 의지적이면서 서정성을 담은 에덴시인의 시 춤추기는 꿈의 시로 예수님 닮기를 바라 십자가 유형의 시어들을 배치하면서 시로 춤춘다. 사철 꽃들이 휘드러지도록 노루 사슴 새와 같이 춤을 춘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춤을 춘다.
이러한 춤추기는 평생 시를 가르치는 춤이었으며 시학이론을 평생 펼치는 춤추기다. 에덴시인의 춤추기는 33살의 2회 리듬인 66세에 신학박사학위로 의지적 춤을 추게 하였으며 목사안수로 춤을 춘다. 그리고는 한국문인교회를 창립 2012. 1. 8.
한 후 첫설교로 ‘무소유의 십자가’ 2012. 3. 25. 무소유의 십자가(마 16:21-26).
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철저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소유를 포기하고 심지어는 죽어 마땅한 원죄의 자아마저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을 긍정하는 삶, 주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삶, 그래서 나는 죽고 오직 너만 존재하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를 부인하는  무소유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에서 나를 부인하는 무소유의 본질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자기 목숨마저 포기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포기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라는 고통의 형벌을 함께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말도 상식적으로는 자기가 짊어져야 할 멍에라고 보겠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도덕적, 사회적, 인간적인 의무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십자가는 그런 추상적인 의무감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동반한 실천적인 십자가입니다. 홍문표, 「무소유의 십자가」(서울: 동천아카데미 5층, 2012.1)에서.
 

평생 자유에의 도전자 에덴시인의 높이 춤추기는 국문학자 홍교수에서 기독교 목사로 ‘무소유의 십자가’로 첫설교를 하고 「사랑한다는 것은」의 시로 춤을 춘다.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십일 쯤
욕망의 잔뿌리마저 자르고
엉겅퀴 가시밭 길
땡볕 광야를 헤매거나
살과 뼈가 엉켜 붙은
깡마른 영혼이 되어
이월의 싸늘한 바람처럼
앙상한 가지에 목을 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 십자가 그 아스라한 높이에
손과 발은
두어 뼘의 대못으로
쾅쾅 두드려 박고
창으로 옆구리마저 찔려
한 서 말쯤 물과 피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풀무로 태워버리거나
절구로 빻아
하얀 가루
은가루 한 줌
대지에 뿌리거나
허공에 바람처럼 날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죽고
내 욕망의 그림자도 죽고
가증한 본능의 흔적마저 부재한
텅 빈 하늘에
오직 너만 있는 것이다
너만 한 송이 붉은 장미가 되어
너만 눈부신 봄 햇살이 되어
파아란 하늘에 가득한 것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모더니즘적이면서도 극히 서정적인 에덴시인은「사랑한다는 것은」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으로 사랑의 서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에덴시인의 삶이나 시에는 모두 ‘너’만 있다. 이 ‘너’는 지극히 대등한 두 사람의 관계를 시어화한 것이다. 철저히 서정적 자아가 부재한 텅 빈 하늘에 오직 너만 한 송이 붉은 장미이며 너만 눈부신 봄 햇살이 되어 있다. 너만 파아란 하늘에 가득하여 에덴시인의 존재가 아닌 그 분이 마음과 몸과 시에 가득한 파아란 하늘이 되어 있다. 이처럼 에덴시인의 춤추기는 ‘너’만 있는 진동이다. “한 송이 붉은 장미”와 “눈부신 봄 햇살”과 “파아란 하늘에 가득”하다. 온통 파아란 하늘만 보이는 에덴시인의 눈 아인 ןיע은 진리 이민영, 『기초 히브리어 תירבע』(서울: 삶 배움터 성서원어 연구원, 1985)., 89.
를 본다. 마음이 가난하여 영의 눈뜬 최명애, 『알기 쉬운 성경 히브리어 기초와 그 의미』(서울: 쿰란출판사, 2005)., 126.
다. 말씀진리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하시기에 덩실덩실 춤추며 눈에 보이네 יניע(에네).
하며 도전에 도전을 거듭한다. 헬라어로 프토포아인 영적 눈이 뜨여 이제는 아예「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오늘도 참 바쁘시네요
새벽엔 어둠의 커튼을 여시고
뒤척이던 밤을 깨우시더니
아침엔 하늘 다락에 숨기신
물 보따리 풀어
산에도 들에도 꽃밭에도
은빛 안개비 골고루 뿌리시고
낮에는 온종일 여린 잎 새 마다
금빛 햇살 한 섬씩 달아 놓으시고는
하늘하늘 실바람으로 어루만지시더니
드디어 노랑 빨강 진보라
꽃망울 반짝반짝 터뜨리시네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아직도 뒤척이는 내 영혼을 일깨워주시고
목마른 믿음의 꽃밭에
말씀의 단비를 흠뻑 내려주소서
성령의 불 바람으로
뜨겁게 달궈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강한 날개로
나를 품어 주소서

그리하여 내 영혼의 꽃밭에도
소망의 꽃이 피게 하시고
구원의 열매로 풍성하게 하시고
날마다 할렐루야
시와 찬양으로 노래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홍문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04:1-15’(서울: 한국문인교회, 15.6.14.)., 설교에서.
에서

에덴시인의 춤은「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요 20:28.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 “새벽엔 어둠의 커튼을 여시고/ 뒤척이던 밤을 깨우시더니/ 아침엔 하늘 다락에 숨기신/ 물 보따리 풀어/ 산에도 들에도 꽃밭에도/ 은빛 안개비 골고루 뿌리시고” 계신다. “낮에는 온종일 여린 잎 새 마다/ 금빛 햇살 한 섬씩 달아 놓으시고는/ 하늘하늘 실바람으로 어루만지시더니/ 드디어 노랑 빨강 진보라/ 꽃망울 반짝반짝 터뜨리시네요”의 시가 절로 나온다. 전율하며 “믿음의 꽃밭에 말씀의 단비를 흠뻑 내려 주소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구원의 열매로 풍성하게 하시고/ 날마다 할렐루야/ 시와 찬양으로 노래”하며 춤을 춘다.

4. 서정적 에덴시인

에덴시인은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라 하다가 사랑하는 이라는 수식어를 빼버리고 아예 나의 하나님이다. 서정시의 진실은 너와 나의 거리 좁힘이다. 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너와 나의 관계를 좁히는 것이다.

밤에는 꿈속에서도
내 숨소리를 살피시고
낮에는 팔딱이는
내 혈관의 맥박을 짚으시며
날마다 내 마음의 잔뿌리에서
흔들리는 가지들의 나부낌마저
눈동자처럼 헤아리시는
나의 하나님

하늘 너머 또 하늘
그 너머 어둠에서 또 어둠으로
내가 숨을지라도
끝내 당신의 오른 손으로 나를 잡아주시는
나의 하나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의 생명책에 나를 기록하시고
저 아늑한 모태에서
나의 내장과 육신을 만드시고는
당신의 형상과 입김으로
아침동산에  나를 우뚝 세워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하며 찬양하며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의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나의 하나님」 홍문표, ‘다윗의 시와 나의 하나님- 시 139: 1-6’(서울: 한국문인교회, 15.3.8)., 설교 때 발표한 시..
에서

대상과 내가 일치되는 서정적 연시를 쓰는 에덴시인의 시에서는 나의 하나님은 밤이나 낮이나 나를 감싸시며 숨소리로 살피시고 행여나 다칠세라 돌보시며 “하늘 너머 또 하늘/ 그 너머 어둠에서 또 어둠으로/ 내가 숨을지라도/ 끝내 당신의 오른 손으로 나를 잡아주시는/ 나의 하나님”이다. 꼼짝없이 포로가 되어 버린 에덴시인의 「나의 하나님」시는 시 전체가 나로 도배되었다. 일반적으로 시에서는 ‘나’라는 말을 안 쓰는 경향이지만 이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나를 반복리듬으로 하면서 나와 하나님 사이의 그 친밀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에덴시인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는 이유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는 여호와와 목자를 동일시한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시란 서로를 구별하지 않고, 서로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시의 본질, 시의 생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를 가사로 하여 노래가 나옵니다. 따라서 시가 없이는 찬송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홍문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서울: 동천 아카데미 5층, 2013. 3. 24)., 한국문인교회 예배 설교에서.
 

홍문표 교수가 에덴시인이 되는 것은 혼자만의 단정이 아니라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기에 따라 한다. 여호와가 보여주시는 일로 하여 따라가는 이유를 에덴 서정시인은 다음과 같이 시로 알려 준다. 

나무들은 하늘만 보네요
언덕에 있는 나무나
골짝에 있는 나무나
바위틈에서 나온 등굽은 나무나
온종일 고개 들어 하늘만 보네요

꽃들도 하늘만 보네요
알록달록 고운 옷 입고
방긋방긋 웃어대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온종일 찬양하며 하늘만 보네요

땅도 바다도 하늘만 보네요
태초부터 지금까지
밤이나 낮이나
비바람 맞으며
천둥번개 맞으며
땡볕에 짓밟히고
겨울 한파에 시달려도
한 결 같이 입 다물고 하늘만 보네요

주여
나도 앞만 보지 말고
맑고 푸르른 저 하늘만 보게하소서
그리하여 맑고 푸르른
당신의 자상한 소리도 듣게 하소서
-「모두가 하늘만 보네요」 15.7.12 모두가 하늘만 보네요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시 29:1-11.
에서   

보여주시는 일, 나무들이 하늘만 본다는 명제를 내세우고는 언덕의 나무 · 골짝의 나무 · 등 굽은 나무 모두 하늘만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적 등가리듬은 1연에서 ‘보네요’를 연 앞뒤로 “보네요” “보내요”로 2회 리듬화 하고 가운데 줄에 “나무나” “나무나” 2회 리듬으로 철저히 성경리듬에 준한다. 보는 것은 하늘만이다. 2연에서 다시 ‘꽃들’이 ‘보네요’로 처음과 끝에 장치하고 가운데 “알록달록” “방긋방긋”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2회리듬의 아름다운 리듬을 수놓는다. 그리고는 “나도”라며 이를 소원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땅과 산들과 나무들이 일어서므로 나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므로 일어선다. 
 
누구일까
누가 꾸민 일일까

땅들이 일어선다
산들이 일어선다
나무들도 일어선다
-「누구일까 누가 꾸민 일일까」에서
 
철저이 일어서기를 배운다. 성경에서 일어서는 일을 처음 보여준 사람은 셋째 사람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갈대 우루에서 일어섰다. 이를 증명하는 일을 성경, 셋째 날에는 물이 모여 일어섰다. 에덴 서정 시인에게는 일어서기 위한 눈물이 있다. 마치 김영랑의 눈물처럼 눈물알갱이가 일어서는 눈물이 에덴시인 시에는 있다. 

연초록 가녀린 잎들이
밤새 어둠을
헹구고 또 헹구어 빚은
아리디 아린 눈물이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여린 잎들과 놀다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아쉬움의 재잘거림

새벽이 눈을 비비고
아침을 마련하는 동안에만
반짝거리는 보석 알갱이

너무도 투명하기에
조그만 동공에
아득한 우주를 품고
너무도 순결하기에
내 영혼의 흔들리는 물결마저
살며시 머금고는
맑은 눈을 깜박거린다

그러나 풀잎의 맨 끝자락에
매어달린
저 아슬아슬한 허공의 아우성
마침내 햇살의 다스한 온기가
있고서야
다시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 「이슬에 대하여」에서

 눈물이 있는 에덴시인 시에 대하여는 본론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언급할 것이다. 그냥 서정 시인이 아니라 에덴시인 서정시다. 이유가 있다. “너무도 순결하기에/ 내 영혼의 흔들리는 물결마저/ 살며시 머금고는/ 맑은 눈을 깜박거린다// 그러나 풀잎의 맨 끝자락에/ 매어달린/ 저 아슬아슬한 허공의 아우성/ 마침내 햇살의 다스한 온기가/ 있고서야/ 다시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 오르기 때문이다. 하늘로 오르는 에덴시인의 시적 긴장성은 이슬이 없어진다는 일반적 속성에서 벗어나 하늘높이 날개를 달고 오르는 아름다운 눈물이다. 바로 에덴으로의 환원이다.
사실적 과학성에 근거한 이러한 하늘 오르기는「안개」시에서도 동일리듬으로 춤춘다. 

안개는 늘 땅을 좋아합니다
모두가 땅에 달라붙어서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고는
구수한 땅내로 허기진 식욕을 채웁니다

안개는 늘 외롭습니다.
밤에는 더더욱 외로워
모두가 아늑한 골짜기로 내려와
다복솔 잔가지들과 노닥거리거나
방긋한 풀꽃들과 술래잡기를 합니다

안개는 늘 목이마릅니다
온종일 산으로 들로 헤매다
목마름으로 지쳐 쓰러지고는
새벽이면 샛강 어귀로 몰려와
강물을 빨아댑니다

안개는 늘 희미합니다
한치 앞도 못 보는 시력이어서
앞뒤 분간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넘어지고
아득한 미로를 헤매다가

눈부신 대낮
저 하늘의 햇살을 먹고서야
화들짝 깨어나
하늘로 하늘로 날아 오릅니다
새하얀 꽃구름 하늘에서 피어납니다
-「안개는」 15. 6. 28 예배 때 신앙시 발표할 때 낭송.
에서
 
일어나기는 하늘로 오르는 일이다. 에덴시인의 시는「안개」시를 통해서 “눈부신 대낮/ 저 하늘의 햇살을 먹고서야/ 화들짝 깨어나/ 하늘로 하늘로 날아 오릅니다/ 새하얀 꽃구름 하늘에서 피어납니다” 꽃구름과 안개가 동일리듬 화 한다. 
에덴시인의 서정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 창조사건조차 일어나는 일로 시작된다.

처음으로
하늘 땅 만드시고
빛이 있으라 
만물들이 빛을 따라 일어났으니
당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엔 궁창이 있고
그 위엔 커다란 물 보따리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달빛으로
저 눈부신 별들의 보석상자
당신 보시기에 좋았더라

숲속엔 노루 사슴 뛰어 놀고
바다엔  파닥이는 물고기들
공중엔 새들의 노래
정말 당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나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모두가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렇게 펑펑 복을 내리셨으니
이제는 당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당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서

당신보시기에 좋은 것은 일어나는 일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을 따라 햇빛 · 달빛 · 노루 · 사슴 · 물고기 · 새들이 일어난다. 만물들이 빛을 따라 일어났으니 서정시인도 밤마다 일어난다.
               
낮에는 햇살들이 누리에 가득하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꽃밭
나는 밤마다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어요

하오나 내 욕망의 나무 사다리는
언제나 추녀 끝에 멈추는 절망
떨어지는 겨울 날개
홀로이 외로운 빈들에서
차가운 돌베개 끌어안고
아득한 하늘만을 우러러 봅니다.

그제야 보이시는 하늘 사다리
땅에서 하늘 끝에 걸어 놓은
오색 빛 무지개
하늘 문이 열리네요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말씀의 꽃비가 온 땅에 내리네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너를 이끌어 이 땅에 오게 하리라

오 벧엘, 당신의 거룩한 집

주여
날마다 하늘사다리를 보게 하소서
말씀의 꽃비로 충만한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하늘 사다리」 설교: 13.12.8 하늘사다리/ 야곱의 하늘사다리, 창 28:10-22.
에서

서정적 에덴시인은 마침내 하늘사다리를 탄다. 이 의지의 모던시인 움직임은 “낮에는 햇살들이 누리에 가득하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꽃밭/ 나는 밤마다/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어요”이다. 이 꿈꾸기는 “땅에서 하늘 끝에 걸어 놓은/ 오색 빛 무지개/ 하늘 문이 열리네요” 이다. “말씀의 꽃비가 온 땅에 내리네요”이다. 이 때 에덴시인이 들은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이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당신의 눈부신 말씀의 꽃밭에서
내 슬픈 영혼도
하얀 나비
노란 나비
호랑나비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추게 하소서

베옷을 기쁨의 띠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당신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내 헐어진 영혼도
색동옷
때때옷
화려한 은총의 띠 옷을 입고
지화자 장단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하소서

미움은 사랑이 되고
죽음은 오히려 부활이 되는
당신의 놀라운 자유의 나라에서
내 가난한 노래는
당신의 시가 되게 하시고
소고치고 장구치고
할렐루야 지화자 좋다
너와 나 모두모두
신명으로 뛰어 노는
주여 그런 춤을 추게 하소서
-「주여 춤을 추게 하소서」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절대적인 진리는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로부터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계시의 사건이고, 현현, 즉 스스로를 들어내는 하강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6(2013년 1월 27일 홍문표 설교)에서.

 

이제 하늘높이 얼마만큼 에덴시인의 시가 진동하며 얼마만큼 오를지 그 기대가 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무엇을 노래하며 춤출 것인가. 본론에서 에덴시인의 시 춤추기는 이어질 것이다. 에덴시인은 일어서기 시인이다. 땅에서 하늘 끝에 걸어놓은 하늘 문이 열리는 꿈 따라 일어서는 힘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일어서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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