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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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비망록

김용호 0 1144

김용호 비망록

어린 시절
1959년 나이가 많으신 김성록 金成錄 1907년 1월 10생
1978년 11월 10일 소천
아버님과
장애우 박금선 朴金仙 1938년 3월 1일생
2001년 10월 15일 소천

31세 차이난 어머님과 결혼하여

아버님 나이 52세
어머님 나이 21세
나는 4형제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학력은
1968년 반송초등학교 입학
1971년 반송초등학교 자퇴 한 게 전부다.
교과서를 살 수 없어 헌 교과서를 구입해야 했으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야단도 많이 맞았다.
겨울에는 결석을 많이 했지만 학교 가는 날은 난로에 피울 장작나무를
해다 줄 수 없는 내 형편은 야단맞는 게 나의 비참한 학교 생활 이였다.
또한 짧은 학창시절 이였지만 이틀 걸러 하루씩 출석하는 것이
보통 이였고 숙제를 해가지 않아 벌받는 시간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어린 나이 였지만 가사를 조력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자퇴 한 후에는 땔나무를 해다 겨울나기를 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나무해야 그 날 다 때는 게 보통 이였고 조금씩
땔나무가 밀리면 팔아 생활비로 썼다.
눈이 쌓인 산에가 나무를 할 때는 손발만 시린 게 아니라 가슴도 시렸다.
가을과 봄에는 약초와 나물 고사리를 캐다 팔아 생계유지를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일을 주로 했다.
어머님은 나의 미래를 조금도 염려하시지 않았다.
전주에서 가끔 오신 할머님도 어머님과 비슷하셨다.
아침에 일찍 깨우면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시키시고
뭘 잘못했는지 까닭도 모르면서 야단치시는 것을 받아 드려야했다.
너무 힘들 때는 내게는 어머님도 외 할머님도 없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더러 했다.
1975년에는 달 머슴도 살 때도 있었는데 주인집에서 내가 하는 일은
누에 밥을 주기 위해 뽕잎을 따거나 소먹이 풀을 베어 나르는 일 이였다.
딴 뽕잎이나 벤 풀을 옮기는 것도 참 힘들었다.
주인집 딸이 학교 가는 것을 보면 퍽이나 무던히 부러웠다.
이 밖에도 날 품팔이도 가끔 했다.

여름에는 전주 외가 집에서 외 할머님 자주 오셔서 채소를
수학해 가셨는데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아 비포장도로
약 7km를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가 지게로 갔다 드려야 했는데 무거운
호박이나 무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는 설명으로 곤란하다.
채소를 가져간 대신에 외 할머님은 전주에서 헌옷과 양발 같은 것을
챙겨다 주어 그걸 입고 신고 나와 동생들은 성장해갔다.
동생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나는 고향을 떠나게 됐다.
내 어린 시절은 내가 빨리 어른이 되어 힘이 센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 꿈은 세끼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전부였다.
정부에서 주는 배급은 밀가루였는데 감자를 넣어 수제비 죽을
끊여 먹는 게 질렸기 때문이다.

1975년 타향살이 시작
외삼촌께서 장래 원만한 안정된 직장으로 생각하시고 세탁소에 취직을
시켜 주기 위해 전주로 데려 갔지만 너무 어려 세탁소 취직은 불가능했다.
외삼촌은 그냥 시골로 귀향시키지 않고 중화요리 집에 취직을 시켜 줬는데
내가 하는 일은 부부사장님 어린 아들 딸 둘을 보아주는 일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점심때나 저녁 시간대에는 음식을 배달했는데 짬뽕이나 우동국물을
쏟아 야단맞는 것은 허다했다.
또한 어린애를 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였지만 침식을 제공해주고
월급도 2천 원을 받기 위해서는 고뇌를 감내해야 했다.
가끔은 아이가 아프면 민간 요법으로 진료를 했는데 진료를 받기 위해
여중생들이 학교 가는 길에 어린 아이를 업고 섞여 진료를 받으려 갈 때는
학교 가는 여학생들이 퍽 이나 무던히 부러워했고 창피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나는 어느 날 서울에 가면 월급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도 있다는 얘길 듣고 외삼촌께
알리지 않고 밤중에 반달 월급 1 천 원과 자장 박스에 옷을 담아
서울을 향해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근심 걱정과 쏟아지는지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 저 또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다.
새벽에 도착한 나는 상상도 못했던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피곤한 몸으로 인적이 분비고 차도 상상외에로 많고 높은 빌딩사이를
배회하다 무작정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가 없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중화요리 집에 들려 자장면을 사먹고 주인에게
따분한 사정을 얘기하고 나는 취직을 하게 됐다.
전주 중화요리 집 가계도 몇 배 크고 주방에도 네 분이나
근무하고 배달원과 남자사장님과 사장님 여 동생 한 분이 함께 일을 했는데
나는 홀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양파 껍질 벗기는 일을 주로 했다.
촌놈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사장님 여동생 누님이 야단도 야무지게
칠 때도 있었지만 너무너무 잘 해주어 고마움을 느끼며 잘 적응해 나갔다.
누나가 옷도 사 주고 월급은 월 4천 원 받기로 했고 전주에서
가지고 온돈 중에 쓰고 남은 350원도 누나에게 맡겼다.

운명이 바뀌는 단계
나는 이곳에서 3개월 넘게 일을 했고 월급도 누나에게 맡겨두고 정도 들어
잘 적응하며 안정을 되찾으면서 난생 처음 고향과 부모님과 동생들을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는데……
한 달에 첫째 셋째 두 번 있는 정기 휴일인 셋째 정기 휴일에 구경 차 혼자
외출을 하게 되었고 버스를 잘 못 탄 탓에 충무로 4가 대한극장 근처에서 내려
내가 일했던 중화요리 집을 찾아가지 못했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니 찾을 길을 없었다.
모아둔 돈도 들었던 정도 되찾았던 안정도 졸지에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대한극장 근처에서 침식만 제공해주는 조건으로 구두닦이로 취직을 했는데
노예취급을 받으면서 한동안 견디다 신문팔이로 직업을 바꾸었다.
다방에 들락거리면서 조간신문 팔아 오전에 100원정도 벌고
석간신문 팔아 120원정도가 수입 2백은 이쪽 저쪽 이였지만 숙소에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고 선배들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으므로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나는 떠돌이 신문팔이보다는 전에처럼 중화요리 집을
취직하고 싶었지만 어려 배달이 불가능해 욕심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크나큰 행운이 찾아왔다.
신문 팔로 다닌 위치 (대한극장 근처 충무로 4가 일우 빌딩 일우다방)
주인 마담 아주머님이 주방장 보조로 일을 해보라는 제의를 해와 말은
"좀 생각해보고요."라고 대답을 했지만 너무 좋은 취직자리라 생각되어
기뻐 뛰고 싶었다.
주인 마담 아주머님은 신문팔이 해서 한 달에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서
나는 거짓말 좀 보태 7천원 정도 된다고 했더니 그럼 월급은
7천 원 준다는 것 이였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신문팔이를 그만둔다는 얘길 하고 내 짐을 싸 가지고
다방에 가서 취직을 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10까지 근무시간은 길었지만 커피 잔을 씻고
세끼 다방 종업원들 식사도 준비하고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좀 힘든 날은 권투나 축구 경기가 있는 날 이였다.
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손님들이 합석을 해 빈자리가 없었는데
다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했고 중계방송이 끝난 후에는
손님들이 빠져나가면 다른 때와는 달리 많은 찻잔을 씻고 청소하기가 더 힘들었다.
내가 만족할만한 좋은 점은 텔레비전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냉 온방이 잘 되는 실내에서 근무를 하기 때문에 비바람 눈보라에도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게 흡족한 직장으로 여겼다.

이 밖에 구두닦이를 할 때나 신문팔이를 할 때는 식사시간도
일정하지 않았고 결식을 많이 했지만 다방에서는 식사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매 끼마다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고 가끔 손님들이 다방 누나에게
사다준 사탕이나 뽀빠이 셈비 과자 과일을 얻어먹을 수 있어 살이 찔 정도였다.

구두닦이를 할 때나 신문팔이를 할 때는 숙소는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소란이 심해 잠을 설치 때도 많았지만 다방에서는 누나 둘과 여 주방장과
넷이 밤에는 함께 동거를 했는데 누나들과 동일하게 의자를 붙여놓고
넓은 곳에서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와는 달리 내가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 까닭은 구두닦이를 할 때나 신문팔이를 할 때는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도 많이 보고 숙소의 비위생적 시설에 질려 다방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를 봐가며 청결을 위해 정진하고 의자를 바르게
나열하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나들이 왜 사랑 해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내가 해야할 일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가금씩 옷도 사다 주어 새 옷을 입고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씩 정기 휴일이 있었는데 내가 최초로 서울구경을
한 것은 두 누나와 남산을 갔었고 두 번 째는 창경원 이였다.
정말 두 누나와 서울 구경을 할 때 어머님이나 친척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느껴졌다.
나는 전에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 귀찮아하는 누나를
바짝 따라다닌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전환점
이곳에서 내 이름은 꼬마였다.
주방장 누나이름은 오양 이였고 한 누나는 최양 이였고 한 누나는 이양 이였다.
오양 누나는 술을 자주 마셨고 신문이나 책을 보지 않았다.
반면에 최양 이양 누나는 틈나는 대로 신문도 보고 책도 보고 시를 읊었는데
나는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나는 공부가 하고 싶다고 부탁해서
최양 이양 누나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가르치다가 꼬마녀석이 답답하다며 꿀밤을 주어 얻어맞기도 많이 했다.
나는 99단은 외웠지만 산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 - x)하는 것도
배웠고 한글을 쓰는 법도 배웠으면 빨래 집게 놓고 A자도 모른 나에게
격려와 칭찬을 하며 ABC도 가르쳐 주었다.
저녁 늦게 어제 배운 복습 시간이 돌아오면 잊어버려 야단 맞을까봐
두 누나 눈치도 많이 봤다.
얼 만큼 세월이 흐른 후에는 나는 텔레비전 자막에 나오는 글도 읽었고
누나들이 보는 책도 읽었지만 독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 까닭은 어려운 낱말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로 읽은 시는 (김소월 초혼) 이였고 그 다음에 (한용훈 님의 침묵)
그 다음에 (윤동주 서시)이였다.
☆★☆★☆★☆★☆★☆★☆★☆★☆★☆★☆★☆★

초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명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닌 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내가 이 시를 읽게된 동기는 이양 누나가 가끔 혼자서 낭송을 했기 때문이다.

9개월 후 이양누나가 결혼을 하기 위해 다방을 그만 두었는데 내가 최초로
축의금을 낸 것이 만원 이였다.
송별식 하는 날 1개월 반에 해당하는 월급이니 거액 이였지만 망 서리지 않고
주었고 누나는 도로 돌려주려 했지만 나는 되돌려 받지 않았다.
그때 나는 너무너무 흐뭇했다.
하지만 강원도에서 하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이양 누나 대신에 서양누나가 왔지만 이 누나와는 다정하게 지내지 못했다.
14일 후에는 주방장 누나 오양이 건강이 나빠 그만두고
이번에는 남자 주방장이 들어왔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말도 많고 성격이 원만치 않아 최양 누나와 서양 누나와
말다툼도 자주 했는데 불만이 많은 최양 누나도 그만 두고 다른 누나가 왔다.
이분들과 함께 하면서 내가 느꼈던 행복은 시들했다.
이 와중에 남자 주방장은 월급은 만 2 천 원 이였는데
내게 월급을 타서 매달 갚겠다면 4만원만 빌려주면 월 이자를 2천 원씩
준다고 해서 주인 마담 아주머님께 맡겨 놓은 돈을 찾아 4만원을 빌려주었는데
며칠 일을 하다 그만 두고 나가 돌아오지 않아 4만을 받지 못했다.
다시 새 남자주방장이 들어와 밑에서 일을 하다가 성격이 맞지 않아
주인 마담 아주머님께 맡겨 놓은 돈 이리저리 쓰고 빌려주고 남은 돈
2만 3 천 원을 찾은 후 큰 가방을 사 내 짐을 챙긴 후 나는 다방을 그만 두고
신문광고를 보고 영등포 약품재료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모든 게 낮 설기만 하지만 나는 또 적응해야 했다.
다방과는 달리 근무시간이 열 두시간이고 숙소도 있고 식사 괜찮게 나와
견디어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약품재료 공장은 남자공원은 20여명인데 여자 공원은 백 명이 넘어
아무나 나이 어린 여자에게는 동생이라고 하고 나이 많은 여자에게는
누나라고 하면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좀 잘 어울려보고 싶은 여자 동료와는 핫도그도 같이 사먹고 가끔
삼류 극장에 가서 영화 보는 게 즐거운 나날로 이여 졌고
나는 수시로 독서도 많이 했다.

1977년 나는 공장생활을 하면서 야간 새마을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올 수가 없어 불가능했다.
이런 나에게 어느 날 동료학생이 숙제로 시를 써오라고 했다면서
고민하는 것을 보고 내가 대신 시를 써 주게 되었다.
그 후 이 동료와 새마을 학교를 가게 되었고 이 동료 아름다눈 여 담임선생님이
우연히 그 동료에게 시를 잘 썼다면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보게 됐다.
그 장면이 뇌리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 나중에 이런 결심을 하게 됐다.

"좋은 시를 써서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내가 시를 잘 쓰게 되면 다방에서 근무하는 정들었던 예쁜 이양의
누나가 (김소월 초혼) (한용훈 님의 침묵) (윤동주 서시)를 읽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내 시를 읽어준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시인이 되려는 의지는 무모한 도전임을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실현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런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이양 누나를 많이 그리워하기도 했고
동료 여 담임선생님이 시를 잘 썼다는 그 칭찬이 내가 시와 함께 하게된
계기가 되었음을 적요해둔다.
나는 공장 생활을 하면서 두꺼운 국어사전을 사 보면서 낱말공부도 상당히 했다.

그러다 나는 월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중화요리 집으로 직장을 옮겨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했지만 돈을 모으지 못했다.



1980년 귀향
1980년 귀향했을 때 아버님은 타계했고 나는 집에서 3km 떨어진
인근 목장에서 걸어서 출퇴근하며 다시 일용직 근로자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이였지만 바로 밑에 동생과 같이 돈을 벌 수 있어 좋았지만
동생은 곧 고향을 떠났다.
당시 하루 일당은 4천 원 이였고 여기서 번 돈은 약 9∼10%는
책을 사는데 썼고 나머지는 나와, 어머님과 둘째 동생 셋 째 동생
생활비로 거이다 썼다.
두 동생은 내 덕택에 중학교까지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동생들이 좀 성장 한 후 나는 농업에도 손을 댔지만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84∼6년 마을 과 2km쯤 떨어진 산 속에 작은 목장이 있었는데
적자로 목장 주인이 목장을 포기해 농지를 무상으로 임대해주어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며 농사를 지으며 독서도 많이 하고 나름대로 글도 많이 썼다.
그 당시 혼자 산 속에 사는 나에게는 냉장고가 없어 김치나 밑반찬은
샘물에 당구어두고 식사시간에 꺼내 먹곤 했다.
생선이나 육 고기는 보관이 불가능하므로 외출 시 소량만 사다
찌개를 끓여 먹었다.
그런가하면 텔레비전 시청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라디오가 유일한 나의 친구였다.
나는 라디오방송에 음악을 신청하거나 글을 많이 투고해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많이 듣고 내 글도 소개되곤 했다.
라디오방송국에서 선물로 받은 탁상용 시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이런 나에게 예상 못한 불행한 사건이 생겼다.
그때 개 두 마리를 키웠는데 개밥을 넉넉하게 주고 2박 3일 동안
외출을 다녀왔는데 이 기간에 개 두 마리가 바람에 열린 방으로 들어갔고
바람에 문이 닫혀 갇힌 개는 내 방을 한마디로 개판을 만들어버렸다.
작은 방에 있는 이불에다 오줌똥을 쌌고 내 옷 전부를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모아둔 추억이 담긴 사진과 종이에 써둔 글들을
모조리 물어 뜯어버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 때 난생 처음으로 내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했고
한 동안 술로 허송세월은 보냈다.

그러다 지인 소개로 나는 다시 고향을 떠나 경남 마산에 가서
건설 현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을 시작 고향을 오가며
되풀이되는 일을 했다.

1992년에는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다.
돈도 좀 벌어볼 요량 이였고 넓은 태평양 바다에가 바다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질이 맞지 않은지 배 멀미를 멈추질 않고 견디지 못한 나는
같은 해 11월에 태평양에서 하선을 결심하고 상선을 얻어 타고
태평양에서는 여름옷을 입고 사모아 (Samoa) 오는데 20일이 걸렸다.
사모아 (Samoa) 호놀룰루(Honolulu)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 거쳐
김해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별별 사람들이
다 쳐다보아 몸 둘 바를 몰랐다.
더 웃기는 것은 너무 추워서 빨리 택시를 타고 강남 논현동을 가야 했는데
여러 대의 택시가 승차 거부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 이였지만 허름한 가방을 들고 여름옷을 입은 내 모습이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승차하기 전에 지참했던 23만원과 달러 돈이 좀 있었는데
보여주고 택시 비를 선불로 준다고 하자 택시를 탈 수 있었다.
동생가계 도착한 나는 동생 옷을 빌려 입고 저녁을 먹고
잠이 들기 전에 별별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내 삶이 왜 이러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 꿈속에
뭘 본 사람처럼 웃기도 했고 뒤돌아보니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이런 나는 고향에 머물다 다시 경남에 가서 건설현장에서 일용근로자로
일을 하다 1994년 동생 도움으로 인력사무실 개설했는데 일정한
거래처가 없었고 월세와 광고비 때문에 적자로 많은 빚을 지고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이 때도 틈틈이 써둔 글을 날려 버렸다.

1995년 시련을 겪어온 나에겐 행운이 찾아 온 듯 했다.
친구 회사에 입사해 안정을 되찾을 즈음에 폐결핵으로 퇴사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사실 나는 뭐가 불행이고 뭐가 행복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삶이 연속 이였다.
1990년대 중반기에는 《역사와 실화》《야사와 사건》《대중실화》
월간 성인잡지에 글을 실기도 했지만 내게 어떤 결과도 없었다.

2000년 어머님 (대뇌 경색증의 후유증)(강직성 편마비)로
거동을 하지 못해 대소변을 받아내며 식사 챙겨 드리며
간병 1년 만에 어머님 소천 하셨다.

나는 그동안 노트에다 써둔 글을 타자기로 타이핑에 보관해오다.
다시 워드프로세스란 기기에 옮겨 저장해오다 다시
컴퓨터로 옮겨 저장 관리해왔다.

그런데 또 2002년 11월 2일날 컴퓨터 저장 된 글 완전삭제 되는
불운을 맞이했다.
어머님 별세 후 고향에서 병원에 건물 관리직으로 취직했는데
비위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돈이 좀 모아지면
여행을 즐겼고 다시 글 쓰는데 전념했다.
새로 글 쓰기를 시작하면서 기대 이상 좋은 성장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머님을 간병하면서 쓴 글도 정리를 다 했는데 2002년 11월 2일날
건설현장에 함께 일했던 사장 아들이 컴퓨터를 정리해두면 좋다고 해서
그럼 정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친구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잠깐 사이 내가 써둔 글들을 전부 완전 삭제해버렸다.

나는 글을 쓸 운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며 허탈감과 아쉬움으로
술을 먹고 자고 술을 먹고 자고……
되풀이되는 허송세월을 보내다 바람 같은 한 여인을 알게 되었고 아주 짧은 기간
지독하게 사랑했지만 그 결과는 비련으로 끝났다.

그래도 나는 시를 써보려는 처음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3년에는 지인 도움으로 웹사이트 (web site)
영문주소 : http://www.gudosesang.com
한글주소 : 그도세상를 개설하기로 작정했다.
원래 한글 주소는 구도자를 뜻해 구도세상이였지만 나는 구도자와 상관없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그도 그럴 것이란 말을 연상시키기 쉬워 《그도세상》과
그리스도 줄임말을 《그도세상》으로 한글 주소를 정했다.

목적은 아는 분들 글도 올리고 내가 써둔 글을 모두 여기에
저장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즐겨 읽었던 좋은 시 좋은 글을 아는 분들과 공유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말이 웹사이트 (web site) 지 3년 동안 누적 방문수가 만 명도 되지 않았다.
내 웹사이트 알려지는 것이 희망사항이 아니 였기 때문에
크게 실망을 하지 않았지만 아쉬움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지만 글을 써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이런 나는 홈페이지 관리하면서 그동안에 썼던 글을 날려버린 것은
새 출발을 하라는 값비싼 충고로 생각하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기간은 정하지 않고 내 홈페이지에다 명시를 포함 내가 좋다고 생각한 시나
내가 읽은 시를 2만 오천 편 정도 올리고 좋은 글도 5 천 편 정도 올리고
예화도 2만 5 천 편 정도 올리고 누적방문 수가 우리나라 인구 10퍼센트가
넘으면 시와 글을 쓰기로 목표를 세웠다.



같은 해 2003년 5월 7일 한 여인 고현자와 교제를 시작했고 꾸준히 전화로
대화를 나누다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 가을에 다음과 같은 병명으로
(대뇌 경색증의 후유증)(강직성 편마비) 거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2006년 우리는 3층에 거주했는데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업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일로 고생도 많이 했는데 내 제의로
시골로 귀향해 생활하면서 늙은 화물차에 태워 장애인 복지관에가
운동도 시키곤 했지만 호전되지는 않았다.
현자씨는 너무 형편이 어려워 내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요양원에가 짧은 기간을
지낸 것말고는 9년 넘게 함께 생활했다.
뒤돌아보면 대소변을 받아내고 좋다는 병원도 많이 쫓아 다녔고 좋다는 약도
많이 구입에 복용 시켰고 업어 차에 태우고 기도원도 많이 다녔지만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아는 분들의 애 경사에 참여를 할 수 없는 것이
크나큰 아쉬움 이였다.
이 외에도 문학모임 사적인 모임에도 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2008년부터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요양서비스를 받아
내가 목욕시켜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됐고 가끔은 외출도 할 수 있었다.
예식장을 가는 날은 남몰래 울기도 했다.
왜냐하면 맛있는 뷔페 음식을 같이 고루 먹을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또한 난방용 땔나무도 많이 할 수 있어 좋았다.

현자씨는 2009년에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중 환자실에서
진료를 받다 기적적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상세불명의 합병증을 동반한 상세불명의 당뇨병)
(다발성 합병증을 동반 인슐린-비의존 당뇨병) (본태성 '원발성' 고혈압)
(상세불명의 고지혈증) (만성 콩팥 '신장' 기능상실로 CAPD 도관 삽입술을
시행 복막 투석)을 시작 된 후부터는
《희귀성 난치병으로 병원비가 무료가 되었음》
집에서 일일 3회 복막 투석을 3회 시켜야 하는데 시간을 지연시키거나
빼먹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장 염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슐린 주사 식전 3회 놓아주어야 했다.
식사도 당뇨환자에게 적합한 음식을 챙겨주는 것은
나의 적지 않은 희생이 필요했다.
하지만 운동부족으로 식욕부진일 때 영양제 주사는 개인 부담 이였지만
1개월에 한 두 번씩은 영양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가난 때문에 현자씨는 모친이 계시지만 우리를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오빠 한 분은 농업에 종사하지만 자녀 양육관계로 생활이 넉넉지 못하고
남동생 둘 (공무원) (회사원) 있지만 현자씨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제 동생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월세로 숙박업을 하는 과정에서
적자를 면치 못해 그만두게 되었고 동생 한사람은 무직이고
또 다른 동생은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우리 둘을 도울 수 없었다.
내가 괴로운 것은 친척 지인 이웃 주민들 애경사가 있을 때
축의금 조의금을 내지 못할 때였다.
이와는 달리 공과금 차량 연료비 때문에 염려도 많이 하는 삶이 이여 졌다.
인터넷 텔레비전 수신료를 내지 못해 끊어졌을 때는 설명으로
곤란하리 만치 답답했다.
인터넷 텔레비전 수신료를 내고 인터넷을 즐기고 텔레비전을 볼 때는
참 무척 행복함을 맛보곤 기뻐하기도 했다.
가끔은 차량 연료비도 걱정을 해야했고 차량 책임보험을 들지 못해
과태료도 밀려 있는 상태가 유지되어가고 있다.
나는 쌀이 떨어져갈 때 감자 옥수수로 식사를 대신하고
현자씨에게는 쌀과 잡곡으로 밥을 지어줄 때도 있었지만 그때 그때 해결 됐다.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 식량문제는 해결 될 수 있었지만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참한 우리 현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자씨는 2005년에는 체중이 63kg에서 65k g사이였는데 복막 투석을
시작하면서 체중이 75kg에서 79kg까지 늘었다.
내 체중은 57kg에서 59kg 이였는데 나보다 더 큰사람을 등에 업어
차에 태우고 병원도 가고 복지관에 운동시키려 갈 때나 가끔은
가고싶어하는 곳 바닷가 공원 유명관광지 여행을 함께 다녔는데
차안에서 복막투석을 하면서 말은 안 했지만 참 힘들었다.
현자씨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국장에가 재미있는
영화를 함께 보는 것 이였다.

이런 현자씨 아내 때문에 2016년 1월 14일
SBS TV 《세상에 이런 일》소제목 《어부바 내 사랑》이란 프로그램에
20여분간 방송된 적도 있다.
이 때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방송을 보고 우리를 돕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후원금을 방송국에서 모아준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절했다.
SBS TV 《세상에 이런 일》촬영을 시작하기 전 나는 PD에게
분명히 말했다.
"우리 부부의 삶을 시청하고 증가 해 가는 이혼율에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조금이라도 감소하는데 기여하길 원한다."라고

해마다 나는 보통 때와는 달리 부부의 날은 현자씨를 위해
건강에 더 좋은 음식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많이 준비했다.
2016년 5월 21일 오전에 모 라디오방송에 요청으로 우리 부부이야기를 할 때
본인 소개 잘하라고 부탁까지 했고 이런 아내는 점심식사까지 잘 했다.
나는 이런 현자씨를 요양보호사가 돌보아 주는 시간을 이용해 외출을 했다.
오후에는 요양보호사와 함께 했던 아내는 요양보호사가 퇴근하고
내가 돌아오기 직전에 혼자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평안한 모습으로 소천했다.
사망사유는 모 대학병원에서 하는 부검 결과 심장마비였다.
건강에 더 좋은 음식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다 먹지 못하고
소천 해 한동안 가슴이 아리고 쓰렸다.

나는 아내의 손발이 되어주는 생활을 함께 하면서 글도 많이 읽고
그도세상 홈페이지에 열정을 쏟아 부어 많은 게시물을 올리고
다음 (Daum) 카페 여러 곳에 좋은 글을 수시로 올리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이 기간에 좋은 글 5천 편, 유머 천 편, 예화 1만 5천 편, 시를 5만 5천 편을
올리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내 나이 61세가 될 2020까지
이 목표를 꼭 달성할 예정이다.
그동안 시를 썼지만 만족할만한 좋은 시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시를 읽어질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예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취미는 독서 영화관람 요리하는 것 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머물 곳에 청결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며
조용한 것을 선호한 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
1986년 개 사건으로 인해 나는 개를 매우 싫어한다.
개를 보면 지금도 쇼크 (shock)로 스트레스(stress)를 받는다.
사람들이 애완견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내 앞에
개가 머물고 있는 것은 불쾌하게 생각한다.
내가 아는 여류시인 집을 방문했을 때 애완견이 와 머뭇거려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좋은 종자이고 비싸게 샀다며
내게 선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게 화를 버럭내는
실수를 한 적도 있다.


2019년 아직도 남아있는 재산
내 나이 60세

① 아내가 없다.
② 자녀가 없다.
③ 부동산은 약간 있지만 임대계약 기간 관계로 매매를 할 수 없다.
④ 호홉기 질환으로 건강이 약간 나쁜 편이다.
⑤ 핏줄로는 형제가 있지만 서로 바쁜 탓에 자주 어울릴 수 없다.
⑥ 타인들에게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으므로 좋은 친구도 없다.
⑦ 못 배우고 가난했으므로 내놓을 만한 이력이 없다.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천국을 간다는 확신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유일한 재산이다.
그리고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사항 또한 아직도 남아있는 재산이다.
이밖에 죽는 날까지 향학심을 불태울 수 있는 취미도 내게 남아있는 재산이다.
거래 형식이 아닌 좋은 인연을 맺어 보고싶은 소망도 아직도 남아있는 재산이다.
아래 자작 글 몇 편을 나열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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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산다는 것은
어느 순간의 경계선이지
내가 믿어야 할
영원은 아니다.

기대와 아쉬움이 어우러진
기쁨도 슬픔도
어느 순간의 경계선이지
영원은 아니다

있어서는 안될 절망도
잃어서는 안될 희망도
어느 순간의 경계선이지
영원은 아니다

삶이란 어차피
기대와 아쉬움과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희망이란
징검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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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 목

김용호

행복보다 불행이
소중한 것은 건널목에
행복이란 아름다운 환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소중한 것은 인내라는
건널목을 통과하면
기쁨으로 맞이할 새로운
성공이 있기 때문이다.

있음보다 없음이
더 소중한 것은 없음 건널목에
나의 쓰일모 있는 삶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삶보다는 죽음이
소중한 것은 일생이란 건널목에
다 채울 수 없는 욕심을
체념하고 더 이상의 미련 없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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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속에

김용호

초록의 꿈을 키우는 아름다운 산천에
바람이 지나 가야 할 곳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사랑이
지나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강으로 이여 지는 계곡에 부드러운
물이 지나 가야 할 곳이 있듯이
우리의 협소한 마음속에 부드러운 이해가
지나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이런 저런 유혹과 갈등에 마음이
조금은 흔들려도 균열이 생겨서는 안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위해
자기를 다 태우는 희생의 촛불 하나
우리의 마음속에 밝혔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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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김용호

살아오면서 있었던 실패도
꿈꿔오면서 있었던 좌절도
희망 속에서 있었던 고통도
평화 속에서 있었던 환난도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영원히 잊기로 하자

부질없는 적대감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도
유익함이 없는 노여움도
있어서는 안될 불만도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영원히 버리기로 하자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수많은 은혜가운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사랑으로 표현 할 줄 아는 삶을 지탱하면서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기로 하자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지혜롭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겸손하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용서하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진실하지 못했는가
뒤돌아보며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하여
지혜롭게 살기로
겸손하게 살기로
용서하며 살기로
진실하게 살기로
내 마음 밭 깊은 곳에 다짐하기로 하자
☆★☆★☆★☆★☆★☆★☆★☆★☆★☆★☆★☆★

상고대와 눈꽃

김용호

이른 아침 산 오르는 길에
홀로 서있는 나무들 위에
극렬한 추위로 태어난
상고대와 눈꽃이
마음 시리게 어울려 있다.

겨울의 영혼이
자연의 피를 얼린 성실한 결과다.
그러나
너무 추움도 해가 뜨면
미세한 떨림은 균열이 된다.

상고대와 눈꽃의 어울림은
햇빛의 도발 (挑發)로
부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늘에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도
행복했던 삶과 불행했던 삶과 상관없이
영원의 원리에 의해 부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늘에 뜻이다.
☆★☆★☆★☆★☆★☆★☆★☆★☆★☆★☆★☆★

하루하루

김용호

허망 됨이 없을
믿음 붙들고 살지요

실망 아니 될
야무진 꿈 붙들고 살지요

목숨 바쳐 사랑해야할 사람들
붙들고 살지요
☆★☆★☆★☆★☆★☆★☆★☆★☆★☆★☆★☆★

그리움

김용호

나는 완벽한 그리움이 있어 좋다.
그리움이란 둘이 할 때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말을
생각 해내고 다른 사람이 내 대신
표현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아주 긴요하게 생각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한 그리움이 있어 좋다.
그리움이란 내가 그이에게
넉넉한 여유로 꾸밈없이 솔직
담백하게 진실 어린 사랑의 말을
할 수 있으며 내 자신을
배반하지 않고 그이를 소유
할 수 있기 대문이다.

나는 완벽한 그리움이 있어 좋다.
내일도 오늘처럼 해와 달이
운행하는 하늘 아래 산 속에 많은
이름 모를 새들처럼 작은 입술 모아
휘파람 불며 그리움을 노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한 그리움이 있어 좋다.
사랑도 흔한 사랑이 아니고
진실도 흔한 진실이 아니고
사랑과 진실이 지닌 그 심오한
뜻에 부족함이 없는 제한 없는
마음으로 오직 그이를
그리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양 누나를 생각하면서 쓴 글이다.
☆★☆★☆★☆★☆★☆★☆★☆★☆★☆★☆★☆★

그리고 가끔 나는 입버릇처럼 중얼거린다.

"누구나 잘 안다.
돈이 많으면 부자 다는 것을
많이 배운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난하다고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 못 배웠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좋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정진하다보면 시련이 따를 수 있겠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으련다.

포기하지 않아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학력이 훌륭한 자격의 여건이 아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작은 실패는 있었지만 큰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이직 성공을 못 했을 뿐이다.

성공의 기준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해내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인 것이다.



김용호 웹사이트 (web site)
한글주소 : 그도세상
영문주소 : http://www.gudoses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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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959년 전북 진안 출생
학력 : 초등학교 3년 자퇴
2014년 문예춘추를 통해 등단
진안문인협회 : 이사
文藝春秋 : 이사
한국문인협회 :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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