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문정희론......서진영

홈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시론, 수필, 감상평 등과 일상적 이야기, 유머, 질문, 답변, 제안 등 형식이나 주제,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하며 향후 이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문정희론......서진영

정해철 0 2961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문정희론......서진영

● 사랑, 마음문에 홍등 걸기 - 문정희論(요약)

문정희의 시(詩)는 잘 읽힌다. 요즘 우리 시에서 흔히 보이는 비판적 탐색이나 비극적 전망, 이로 인한 관념적 상징 같은 것은 그녀의 시에선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시력(詩歷) 3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그녀가 어찌 생활의 타성과 속세의 욕망에 젖지 않았으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는 여전히 건강하고 솔직하다. 그녀에게 시란 마음의 무늬에 따라 진행된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정희 시의 일상적 자연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원초적 본능, 자연스러운 몸의 욕망과 시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야생의 히스크리프를 꿈꾸기, 그 니체적 불길

‘내 허리를 휘감아 줄 사내는 없는가’. 시 ‘폭풍우’ 첫머리에 놓인 이 당당한 외침은 우리 시의 문법에서, 그리고 생활적 관습에서 다분히 일탈적이다. 그러나 육체적 욕망이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원초적 욕구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흐름을 억지로 얽어매 놓고 ‘죄스러운 것’으로 규정지은 관습의 굴레는 그녀에게는 ‘뜻도 모른 채 갇히는 천년 습관의 동굴(‘다시 부엌노래’)’일 뿐이다.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경계지어지고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는가. 차갑고 무감각한 기계 문명 속에서 논리적이고 지적인 근대적 자아는 얼마나 많은 자신의 감성과 욕구를 억압해야 했던가. 그녀가 그리워하는 ‘저 야생의 히스크리프’란 문명에 의해 훼손당하기 이전의 인간 본연의 순수함, 그 막힘 없는 자연스러운 열정을 표상한다. 그리하여 탈주를 꿈꾸는 그녀의 욕망은 ‘붉은 머리 풀어헤치고 으르렁거리며’ 하늘로의 비상을 시작한다.

붉은 머리 풀어헤치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반역과 저항의 불. 이를 ‘니체적 불’이라 명명해도 좋으리라. ‘니체적 불’의 역동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노발리스적 불’의 질료적 풍요로움, 따스한 행복감과 구별했던 것은 바슐라르였던가. 니체적 불은 솟아오르는 화살과 같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목숨의 노래’)라고 말하거나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전보’)라고 말할 때 그녀는 화살처럼 강렬한 불길을 노래한다. 소통 불가능한 경계를 따뜻한 열정으로 해체하는 그녀 시에서의 불은 물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다. 너와 나, 남성과 여성, 물과 불, 이성과 감성, 도덕과 본능, 아름다움과 추함처럼 서로 상반되는 관계로 으레 인정되어 왔던 것들을 하나로 혼융하는 용광로, 그것이 문정희 시의 불이다. 이 때 불은 물이기도 하다.


2. 사랑, 마음문에 홍등 걸기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로 향하고 물처럼 흘러가던 사랑이 불이 되어 비상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새떼’의 ‘경계 허물기’는 ‘실’에서 너와 나 사이의 다리 놓여짐으로 이어진다. 문명적인 자아에게 타인이란 영원히 합치될 수 없는 ‘타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인의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나와 타자는 동질적이며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너에게 꽃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던 한 시인을 기억한다. 그러나 김춘수에게 있어 그것은 지난(至難)한 일이었나 보다. 그는 끝내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라고 절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정희는 너와 나 사이에 놓인 다리가 ‘큰 꽃을 피우는 것을 본다’(‘실’). 꽃은 하나됨의 의미있는 순간을 표상한다. 실로 너와 내가 하나되는 순간이란 자아의 확고하고 가식적인 틀을 벗고 타인을 관대함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타인을 기다리기보다 타인을 향해 내가 먼저 나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늘은 맑은 날, 아무 의미 없어/거울 같은 날 종이에다 시 대신 달을 그린다 (중략) 당신이 나를 문(Moon)이라 불러주므로/달은 나의 문패, 나는 문(文)이요, 문(moon)이 되어 그리움으로 둥실 떠오른다. 가등이 되어 세상의 슬픔들을 속속들이 비추고/차라리 홍등이 되어도 좋지 사랑 찾아 거리를 서성이는/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이/무상으로 그 문(門)을 열어도 좋지 -‘문’부분

어느 맑은 날, 시인은 종이에다 시 대신 달을 그린다. 그리고 달을 대문에 내걸어 문패로 삼는다. 이 때 달은 곧 시이자 시인 자신이 되는 셈이다. 왜 하필 달일까. 그것은 첫째, 그녀의 성(姓)이 다름 아닌 문(Moon)이고, 둘째는 그녀가 시를 쓰는 문(文)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다소 말장난(fun) 섞인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실상 시인이 달을 그린 이유는 그 다음에 있다. 이 시에서 세 번째 등장하는 ‘문’은 진짜 달을 의미하는 문(moon)이다. 이 달은 가등이 되어 세상의 슬픔들을 속속들이 비춰주고자 한다. 달 그림을 대문 앞에 내걸면서 그녀는 홍등이 아니라 황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차라리 홍등이 되어도 좋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슬픔들을 속속들이 비추고 싶어하는 달의 소망과 관련되는 것으로, 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을 아무 대가없이 포용하고 싶어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네 번째 ‘문(門)’이 된다. ‘문’의 동음이의어가 많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런 재치 넘치는 시는 그야말로 문정희 스타일이다. 그러나 표면적인 발랄함과 재치에만 그치지 않는 이 시는 어떤 울림을 가지고 있다. 시란 결국 달과 같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인 역시 달이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은 이 부러울 것 없는 듯한 물질문명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저 차가운 표정의 인간들이 알고 보면 모두들 ‘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이라는 것을 간파한 시인이 시를 통해 존재간의 진정한 합일의 영역을 마련하고자 함이다. 시인이 남달리 따뜻한 가슴으로 타인들을 향해 마음 빗장을 여는 그 순간, 시인은 메마른 도시를 탈출하여 달빛 쏟아지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에로스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으로 향한다.


3. 달빛 아래 빛나는 에로스적 욕망

시간이란 한낱 美文/ 그 부끄러움 위에/ 떠돌게 하소서// 달빛 꾀어내는 풀피리에도/ 몸이 달아/ 냄새와 능멸로 살아나는/배암이게 하소서// 천하고 무지한 신명들려/ 햇빛이 직선으로 쏟아지는/ 거친 돌밭에 입으로는 말고/ 몸으로만 몸으로만 소리치게 하소서 생각이란 생각은 죄다 벗고/ 무서운 비밀을 본 者처럼/두 눈도 없이 시간의 황홀한 江가에 내내/ 비늘로 떠돌게 하소서 -‘生命의 詩’ 전문


타인을 향하여 기꺼이 홍등을 내거는 그녀는 곧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 분출, 에로스적 욕망을 허용한다. ‘냄새와 능멸로 살아나는 배암’이 된다는 것. 그것은 문명사에서 원죄로까지 정죄되었던 원초적 욕망과 본능적 충동의 부끄러움과 능멸스러움을 승인하면서 오히려 ‘천하고 무지한 신명’들기를 기꺼이 자처하는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파 시인 서정주의 영상을 떠올린다. 꽃다님같은 뱀의 황홀한 매혹과 그 뒤를 쫓는 가쁜 숨결의 디오니소스적 도취, 이미 천상적 질서를 거역한 악한 존재인 ‘배암’이 내뿜는 그 강렬한 생(生)의 충동과 관능을 말이다. 시인 역시 스승 서정주의 강렬한 호흡에 감염되었나 보다. ‘달빛 꾀어내는 풀피리에도 몸이 달아’오르는 에로스적 영상은 이제껏 문명사회를 이끌었던 현실 원칙, 이성적 사유가 지배하는 태양의 세계 저편에 자리한다. 타자성으로, 비정상으로, 비도덕의 이름으로 능멸되어 왔던 것들을 되살리기, 그 시도는 언제나 달빛의 영상 아래 존재한다. 신화 속에서 달은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신비한 에로스(eros)로 충동과 무의식, 비합리성, 그리고 원초적 본능과 같은 모든 여성적 원칙을 포괄한다.

시인은 이제 어둠과 저주와 악(惡)과 무의식의 화신, ‘배암’이 되어 입으로는 말고 ‘몸으로만 몸으로만 소리치’고자 한다. ‘생각이란 생각은 죄다 벗고’, ‘두 눈도 없이’ 온 몸으로 소리치기란 무엇을 갈망하는 몸부림인가. 로고스(logos)의 명징한 인식의 공간에서 언어(言語)란 이성적 사유, 로고스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 또한 근대문명의 토대가 된 ‘차이의 시선’은 강렬한 이성의 태양빛에 근거한 눈(目)에의 신념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제 시인은 입을 닫아 로고스의 언어를 폐쇄하고 두 눈도 없이 온몸으로 소리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성중심주의적 사유체계 내에서 ‘정신’과 대립적인 의미에서의 ‘몸’, 그 방탕하고 더럽고 자기 파괴적인 쇠퇴와 갈등의 기호. 그러나 시인은 ‘몸으로만 소리치기’를 통해 달빛에 드리워진 그 모든 열등함과 억압의 기호들을 당당히 표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달빛과 공모하는 에로스적 욕망이 항상 자기파괴의 위험한 기호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 시에서처럼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략…)


4.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

천년동안 줄줄이 낳은 감자가 그렇듯이 문정희의 시편들에서는 다산(多産)의 욕구가 넘쳐난다. 그녀의 에로스적 욕망은 곧 산욕(産慾)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시 ‘머리감는 여자’에서 시인이 꿈꾸는 곳, 뽀뽈라는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열대 밀림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 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도상에서 그곳이 어디라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쨌든 그곳은 문명, 혹은 근대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아득한 원시림 한복판이다. 그 무성한 초록의 원시림,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꿈꾸는가. 익명의 한 마야 여인이 되어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보려는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다시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혹 소멸한 듯 보이는 어떤 것도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재탄생의 순간이 오는 그곳에서 ‘밤마다 쑥쑥 아이를 배고 해마다 쑥쑥 아이를 낳’는 여인은 자연의 무한한 재생의 신비를 재현한다.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는 뽀뽈라의 ‘풍성한 다산의 여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 위대한 어머니 여신(Great Mother)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문명의 세계에선 어떠한가. 위 시의 두 번째 연에서처럼 문명세계의 불길함은 검은 하수구를 타고 떠내려가는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 들어내버린 자궁들로 묘사된다. 이것들은 모두 생산력을 상실한 황량한 불모지로서의 여성의 몸, 그리고 결핍된 모성성을 상징한다. ‘떠내려가는 콘돔’은 문명인의 섹스가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실태를 상징한다. 오로지 감각적 쾌락만을 위해 성행위를 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라던가. 그만큼 그것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이로 인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이기적 욕망은 진정 자기를 위한 욕망인가.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인은 문명세계를 ‘거대한 노예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시간의 노예이든, 탐욕의 노예이든 어쨌거나 문명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 이 때 시인이 꿈꾸는 뽀뽈라는 단순히 문명에서 동떨어진 원시림이라는 장소의 의미를 벗어난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곳, 즉 문명에 의해 억압되어 온 원초적 본능과 충동, 무의식 같은 여성적 원칙들, 에로스적 욕망이 차단되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신비롭게 동화되는 경지가 바로 ‘뽀뽈라’인 것이다. 문명사회의 병약한 이성을 비웃는 원시적 관능의 야성(野性), 그 왕성한 생명력은 이성과 논리에 의해 규격화되고 거세되고 위축되었던 우리 몸 안의 많은 것들을 되살려낸다.


5. 물로 스미기, 그 화해의 정경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물을 만드는 여자’부분


정신과 이성의 논리에 의해 한없이 비천한 것으로 소외되어왔던 여성의 몸은 자연의 섭리 안에서 회복되고, 나아가 가장 성스러운 영역으로 비상한다. 세상의 모든 푸른 생명들을 길러내는 일은 자연법칙 안에서 일종의 성스러운 제의(祭儀)이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심지어 오줌까지도 ‘아름다운 몸 속의 강물’이 되어 생명을 소생시키고 무성하게 키워내는 고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물을 길러내고 소생시키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의 다산적(多産的) 자궁, 그 무한한 부드러움을 환기하는 유동적인 물의 흐름은 일정한 형태와 견고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하게 정형화된 고체로서의 이성적 사고 이전의 것이다.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어머니 화자는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이 조용히’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라고 말한다. ‘완강한 바위’처럼 단단한 근대적 이성과의 맞대결이란 끊임없는 대결과 피흘림의 투쟁으로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대결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식, 즉 대립의 경계를 허무는 초월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편의 경계 안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방식이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는 한 몸이 되고, 그 합일의 순간은 모든 생명 존재를 정화하고 탄생시키는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 물이고 싶다. /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 가시의 끝의 끝까지 /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 안겨 / 지상의 것들을 /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비의 사랑’ 전문


위 시의 화자는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자 한다. 그 ‘뼈’란 ‘물을 만드는 여자’에서 등장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의 변용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타자의 그 단단한 이분법을 어떻게 허물 것인가. 단단하게 굳어진 고체덩어리를 깨뜨릴 수 있는 방법,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를 허무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물을 만드는 여자’에서 배웠다. 그 방법은 물이 되는 것이다. 딱딱한 경계 안으로 물처럼 스며들기. 그 부드러운 흡수의 전략은 ‘그대’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적시’다가 마침내 그것들은 ‘말갛게 씻어’낼 것이다. 이분법적 대립의 경계를 허무는 초월의 비전 하에서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모두 ‘나의 오빠’(‘오빠’)가 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의 시선, 그 갈등과 억압의 기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상 남자들을 지배하는 자, 억압하는 자에서 보호하는 자, 헌신하는 자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타자와 내가 같은 범주로 묶이고 같은 공간에 거주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곧 ‘타인을 받아들임(l'hospitalite)'으로 가능한 화해의 정경이다. 타인과 같은 공간에 거주하기란 곧 나를 허물기에 다름 아닌 것. 비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 몰래 밤을 새워 제 깃털을 뽑는 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 찾아 거리를 서성이는 외롭고 가난한 그대들’을 위해 차라리 홍등이 되어도 좋을, ‘나’를 걸어 잠갔던 빗장을 여는 과정일 것이다. 자아를 타자가 존재할 공간으로 삼을 때, 그 때에서야 비로소 완강하고 단단한 그대의 몸에서도 생명의 눈이 틔워지리라.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눈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끝>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