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허초희 2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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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24 14:38
난설헌 허초희(楚 姬) Ⅱ
난설헌의 생가(生家)를 나와 아내와 잠시 집 주변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살아 생전 세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 첫째가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고 두번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남편 김성립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15세 안동김씨 가문에 시집을 간 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슬하(膝下) 두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린 나이에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덕무의 [靑莊館全書]에 당대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난설헌을 가인(佳人)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상당한 미모(美貌)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품도 매우 어질었다고 하였다.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는 별로 좋지 못한 것 같다고 동생 허균(許筠)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식(學識)과 미색(美色)을 겸비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늘 학문에 전념하고 있어으니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예뻐 보일리 없었을 것이며, 아내의 빼어난 문예(文藝)는 남편의 질투(嫉妬)를 유발시켰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당시 여자가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잘 길들여졌있던 사대부(士大夫)들에게는 눈 밖에 날 일이었을 것이다.
허 초희는 조선중기에 태어난 여류시인이지만 문장에 있어서 조선시대 전체를 살펴봐도 그녀와 견줄만한 여류시인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신사임당, 황진이, 홍랑등 여류시인들이 있지만 초희에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버지 허엽(許曄)의 객사(客死) 둘째 오빠 허봉의 죽음 그리고 동생인 허균의 반역죄로 인한 능지처참(陵遲處斬) 남편과 시어머니간의 갈들 두 자식의 죽음 그리고 당시의 훈구(勳舊).사림(士林)의 끝없는 당쟁(黨爭)으로 인한 정치혼란 여성차별등이 초희를 더욱 절망(絶望)으로 내몰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이미 8세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神童)으로 불렀을 만큼 뛰어난 문학적 기질(基質)을 타고 났다. 그녀는 주변의 고뇌(苦惱)를 시로서 승화(昇華) 시키어 섬세한 필치로 여성의 감상(感想)을 노래하였다. 그녀의 작품중 망선요(望仙謠)를 보면 현세의 질곡(桎梏)을 탈피하여 도교(道敎) 풍의 시로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披瀝) 하였던 것 같다. 27살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夭折)한 것은 아마도 당시의 주변상황이 그녀를 단명(短命) 토록 강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豫見)하고 손수지은 수많은 작품들을 다비(茶毘 : 화장) 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승을 떠나기전 흔적(痕迹)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생각이든다. 그녀가 천수(天壽)를 누리고 그녀의 작품이 전해졌다면 영국의 섹스피어와 견줄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 다행히도 그녀를 기리는 추모사업이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주최로 1999년 이래 매년9월중순 강릉시 초당동 그녀의 생가(生家)에서 개최하고 있어 다행이다. 제5회째가 되는 올해는 꼭 참여해 볼 계획이다. 다시한번 나오는 분루(憤漏)를 참을 길이 없다.
2003. 5. 5. 아침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허초희 생가(生家)에서
난설헌의 생가(生家)를 나와 아내와 잠시 집 주변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살아 생전 세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 첫째가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고 두번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남편 김성립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15세 안동김씨 가문에 시집을 간 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슬하(膝下) 두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린 나이에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덕무의 [靑莊館全書]에 당대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난설헌을 가인(佳人)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상당한 미모(美貌)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품도 매우 어질었다고 하였다.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는 별로 좋지 못한 것 같다고 동생 허균(許筠)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식(學識)과 미색(美色)을 겸비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늘 학문에 전념하고 있어으니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예뻐 보일리 없었을 것이며, 아내의 빼어난 문예(文藝)는 남편의 질투(嫉妬)를 유발시켰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당시 여자가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잘 길들여졌있던 사대부(士大夫)들에게는 눈 밖에 날 일이었을 것이다.
허 초희는 조선중기에 태어난 여류시인이지만 문장에 있어서 조선시대 전체를 살펴봐도 그녀와 견줄만한 여류시인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신사임당, 황진이, 홍랑등 여류시인들이 있지만 초희에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버지 허엽(許曄)의 객사(客死) 둘째 오빠 허봉의 죽음 그리고 동생인 허균의 반역죄로 인한 능지처참(陵遲處斬) 남편과 시어머니간의 갈들 두 자식의 죽음 그리고 당시의 훈구(勳舊).사림(士林)의 끝없는 당쟁(黨爭)으로 인한 정치혼란 여성차별등이 초희를 더욱 절망(絶望)으로 내몰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이미 8세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神童)으로 불렀을 만큼 뛰어난 문학적 기질(基質)을 타고 났다. 그녀는 주변의 고뇌(苦惱)를 시로서 승화(昇華) 시키어 섬세한 필치로 여성의 감상(感想)을 노래하였다. 그녀의 작품중 망선요(望仙謠)를 보면 현세의 질곡(桎梏)을 탈피하여 도교(道敎) 풍의 시로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披瀝) 하였던 것 같다. 27살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夭折)한 것은 아마도 당시의 주변상황이 그녀를 단명(短命) 토록 강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豫見)하고 손수지은 수많은 작품들을 다비(茶毘 : 화장) 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승을 떠나기전 흔적(痕迹)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생각이든다. 그녀가 천수(天壽)를 누리고 그녀의 작품이 전해졌다면 영국의 섹스피어와 견줄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 다행히도 그녀를 기리는 추모사업이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주최로 1999년 이래 매년9월중순 강릉시 초당동 그녀의 생가(生家)에서 개최하고 있어 다행이다. 제5회째가 되는 올해는 꼭 참여해 볼 계획이다. 다시한번 나오는 분루(憤漏)를 참을 길이 없다.
2003. 5. 5. 아침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허초희 생가(生家)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