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허초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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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허초희 3

최재효 0 3210
난설헌 허초희 3



요즘 우연히 허 초희(호 허난설헌) 관련 문헌을 접하다가 이제는 내 스스로 그녀의 삶과 작품에 관심을 쏟고 있다. 두 딸들은 일요일이라고 오전 10시까지 늦잠을 자고 방금 일어났다. 어제밤 허 초희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몇 군데 다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아내 또한 새벽 5시쯤 일어나 산악친목회 활동에 참가하고 방금 들어왔다.


간밤에 인터넷에서 얻은 허초희 관련정보를 메모하고 그녀가 영면(永眠)하고 있는 묘소를 직접 찾아 가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대충 허초희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외출 준비를 시켰다. 아이들은 허초희 묘소를 간다는 자체 보다 일요일을 무료(無聊)하게 집에서 보내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더 즐거워 하는 눈치다.


인천에서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성남에서 나와 3번국도와 389번 국도를 거쳐 물어물어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뒷산 안동김씨 선영에 도착하였다. 인천에서 대략 1시간 2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명성(名聲)과 달리 그녀의 묘소를 찾아가는데 이정표(里程標)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도에도 그녀의 묘소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물어 보아도 허 난설헌이 누구인지 어디에 묘소가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액석(哀惜)하고 안타까웠다. 그녀의 묘소를 가다가 발견한 것은 지월리 그녀의 묘소입구에 전봇대에 조그만한 이정표 하나와 오석(烏石)에 새겨진 안내표지가 전부였다. 난설헌의 묘소앞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하루 24시간 고속으로 질주하는 각종 차량의 소음에 고인들이 편히 쉬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먼저 절을 하자 아내와 아이들도 영문을 모르고 허난설헌 묘에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난 둘째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나를 쳐다 보았다. 주로 조선시대 왕릉을 많이 보아온 아이들은 묘소와 시비(詩碑)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초희 묘소는 지월리 경수산중턱을 깍아 4단으로 만든 안동김씨 선영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다. 1단은 주차장으로 대략 250평 정도 되어 보이고 철판으로 된 허초희 관련 안내 표지판이 하나가 세워져 있다. 2단부터 4단까지는 각층이 대략 100여평 정도 되어 보였다. 2단에는 난설헌의 무덤 옆으로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 ; 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고 씌인 비석이 있고 우측 앞쪽에 어려서 일찍 세상을 떠난 그녀의 아들과 딸의 무덤 두기가 나란히 있고 그녀의 무덤 좌측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그의 두자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읊은 곡자(哭子)가 뒷면에는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지은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 새겨져 있다. 곡자를 읊어 보았다.


"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구나.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는데 쓸쓸한 바람 백양 나무에 불어 오고, 도깨비불 반짝이는 숲속에서, 지전(紙錢) 날리며 너희들의 혼을 부르노라. 가엾은 너희 남매의 넋은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 비록 배에 아이를 가지고 있지만, 어찌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슬픈 피 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어린 두 자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어머니의 피맺힌 절규가 느껴졌다. 그녀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시를 책에서 감상 할 때는 몰랐는데 그녀의 묘소에서 읽어보니 내 여린 마음이 뭉클해 졌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아이들이 볼까봐 얼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난설헌의 어린 두 남매의 묘는 나란히 붙어 있는데 가운데에는 난설헌의 오빠 허봉(許 이 지은 "희윤묘시'라는 시가 씌인 비문(碑文)이 눈길을 끌었다. 난설헌의 아들 희윤(喜胤)의 외삼촌의 입장에서 어린 나이에 죽은 조카들을 애통해 하며 지은 비문이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담( )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두 아이들의 죽음을 어머니 난설헌과 외 삼촌인 허봉이 지은 두 시문이 나의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 허엽의 객사, 자신을 가장 위해주던 오빠 허봉과 스승 이달의 죽음, 사랑하는 어린 두 남매의 죽음 그리고 시어머니 송씨와 남편 김성립과의 불화와 갈등 여자에게 남존여비와 삼종지도를 강요하던 조선양반 사회등 당시 그녀의 주변상황은 그녀를 절망속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하였고 결국 27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떴다. 묘소 앞에 앉아 한참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경수산의 푸른 녹음속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은 그러한 슬픈 사연을 아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배고프니 그만 가자고 하는 큰 딸애의 요구를 모른체 하고 3단으로 올라 가봤다. 우측으로 난설헌의 남편인 김성립과 난설헌 사후 부인인 홍씨와의 합장묘가 있고 우측으로 "증이조참판행홍문관저작김공성립지묘 증정부인남양홍씨부 : 贈吏曹參判行弘文館著金公誠立之墓 贈貞夫人南陽洪氏 "라고 씌인 비석이 있고 좌측으로는 김성립의 남동생인 김정립의 묘가 나란히 있다. 한가지 의문점은 김성립의 정부인이 난설헌인데 어떻게 해서 두 번째 부인인 남양홍씨와 합장이 되어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맨위 4단에는 김성립의 조부인 영의정을 지낸 김홍도(金弘度)와 아버지 김담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 안동김씨 선영은 1985년에 중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안동김씨종중에서 정부의 도로정책에 협조하여 이곳으로 난설헌을 비롯 조상들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산세도 수려하고 명당인데 단지 자동차 소음(騷音)이 흠이었다. 난설헌과 그녀의 어린 두 남매의 무덤을 뒤로하고 오는 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녀의 묘소를 그녀의 생가(生家)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으로 이장을 하던이 아니면 이 근처에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여 이장을 하여 테마공원으로 단장을 하고 기념관도 건립하여 널리 알리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좋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순두부로 유명한 강릉시 초당동 그녀의 생가는 관광지가 되어 하루에도 그 생가를 찾는 이가 많은데 정작 그녀의 묘소를 찾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2003.5.18 13:25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허난설헌 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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