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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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고

유용선 0 2283
……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단지 솜털투성이의 한 마리 벌레뿐인데 저나 당신의 내부에 한 마리의 나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 ……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만큼 절실하게 날기를 원할 때 그것은 가능하단다. …… 목숨을 버리라는 말씀인가요? ……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


1. 대화를 나누기 전에

고치 속에 갇혔던 나비들이 깨어나자 황량했던 들판에 꽃들이 반기듯 다투어 핍니다. 애벌레들은 그 순간에도 고치 속에서 나비가 되어가고 나뭇가지는 꽃을 피우며 점점 화려해집니다. 들판 전체가 색채와 향기로 가득합니다. 그 풍경을 마지막으로 책의 본문이 끝나고 작가는 후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꽃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나비가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을 엮어내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어느 미술가에게 누군가가 그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느냐고 묻자 그는 "5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온 생애가 걸렸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 책도 그와 같다. 책의 출판에 도움을 주신 분들과 그것이 가능하도록 <온 생애에 영향을 주신 분들>에게는 이 책 자체가 나의 가장 큰 감사의 표시가 될 줄로 안다. 이 책은 내가 아는 모든 분들과 내가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정의가 꽃피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나와 더불어 <보다 충만 된> 삶을 추구하는 분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대략 삼십분 정도면 다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고, 더구나 어지간한 사람이면 특별한 문학적 관심이 없더라도 이미 일독하였을 만큼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혹여 긴 문장과 어른스러운 문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읽지 않은 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분께는 이 글을 읽기 전이나 후에 꼭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2.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일까?

밝은 햇살과 시원한 그늘 아래 맘껏 먹고 자라는 풍요를 누리던 줄무늬 애벌레에게 어느 날 회의가 찾아옵니다. 그냥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일까?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머리를 땅에 박다시피하고 지내온 시간 속에서 이 줄무늬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한 것은 아마도 그의 한 가지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런 나눔도 없는 저혼자만의 편안함과 배부름은 그 본성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본성의 첫 단계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갖는 것으로서 아마도 "외로움"이라는 자각증세일 것입니다.
먹기만을 위한 생활에 회의와 불만을 느낀 줄무늬는 자기와 같은 부류인 다른 무늬의 애벌레들을 만납니다. 첫 번째 만난 부류는 자기의 과거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줄무늬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는커녕 줄무늬가 말을 건네기조차 어려울만큼 먹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어느 날 줄무늬가 만난 애벌레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적어도 이들은 앞으로 나가며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줄무늬가 그들이 가는 방향의 먼 끝을 바라보자 거기엔 하늘 높이 치솟은 큰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들 틈에 끼여서 기어가자 기둥의 실체가 나타납니다. 위로 오르려는 애벌레들이 서로 엉키고 쌓여 이룩된 커다란 기둥의 꼭대기는 구름에 쌓여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왜 위로 오르는지 까닭도 모르는 채 기어오르는 애벌레들과 그 기둥을 보며 줄무늬는 충분한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 속으로 밀치고 들어갑니다.

비인간적이고 반지성적인 교육체제 아래 충분한 삶의 철학을 갖출 기회를 잃고 몸뚱이만 먼저 성인이 된 탓에 보내야만 했던 청년기 초기의 방황을 떠올리며, 나는 책을 펼쳐 읽은 지 5분도 채 안되어 줄무늬와 하나가 됩니다. 줄무늬는 이제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닌 나 자신입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단지 위로 오르겠다는 일념 하에 서로 밟고 밟히며 기어오르는 그 더미 속에서, 우정은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동료란 그저 밀치고 넘어가야 할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따름입니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야? 도대체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 따위 것은 생각해 볼 틈도 없다구!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줄무늬가 고함을 지릅니다. 누구에게가 아닌 자신에게 한 말이라도 듣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줄무늬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와 똑같은 회의를 하며 번민하던 노랑 애벌레에게 줄무늬는 유대감을 갖게 됩니다. 어느 날 막다른 길에서 줄무늬는 계속 오르기 위해 노랑 애벌레의 머리를 밟고 올라섭니다.

저 꼭대기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과연 이런 행동을 할 만큼 가치가 있단 말인가? 다정한 눈빛이 오간 사이는 이제 더 이상 밀치고 넘어서야 할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곧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된 줄무늬와 노랑 애벌레는 서로 부둥켜안고 애벌레의 탑에서 내려옵니다. 무리 속에서 밟히고 짓눌려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평화로운 사랑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둘만의 것이고 시한부적인 것이어서 줄무늬의 애초에 가졌던 의문의 해답은 되지 못합니다. 삶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 이상의 것이 있을 거야. 내가 다 오르지 못한 꼭대기엔 무엇이 있을까? 상념에 잠긴 줄무늬는 어느 날 기둥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한 애벌레의 유언을 듣습니다. 저 꼭대기……그들은 보게 될 거야 ……나비들만이 ……. 이제 줄무늬의 의문은 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고, 남아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노랑 애벌레를 두고 그는 다시금 혼자 기둥에 오릅니다.

이 즈음 줄무늬가 꼭 지난날의 내 모습 같군요. 끝을 알지 못하는 여러 갈래의 길에 발을 딛고 정신을 팔며 청춘의 많은 시간을 소진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줄무늬처럼 친구 하나에게라도 충실했던 시간이 내게 있었던가 싶습니다. 친구를 외로움으로 몰아넣고 그의 시선이 내게 짙은 염려로 박힘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저 안개 속 같은 내 길을 고집스레 걸어왔습니다. 친구는 친구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삶에는 틀림없이 다른 무엇이 있을 거야." 마음 내밀한 곳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사라지든지, 아니면 그 대답을 찾는 환희의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줄무늬가 마침내 꼭대기로부터 빛이 스며들어오는 지점까지 이른 그곳은 허튼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는 위험한 곳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습니다. 섬뜩하게도! 그토록 원하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뿐더러, 기둥 저 너머에는 그가 오른 기둥과 같은 애벌레의 기둥이 이미 여럿 있었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맨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할 것인가, 이 길을 도로 내려가야 할 것인가, 적어도 이건 아닌데……

정상에서 줄무늬는 노랑나비를 만납니다. 그 다정스럽고도 낯익은 눈길에는 무한한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간을 생략하고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노랑나비는 바로 노랑애벌레의 변신이고 줄무늬 역시 고치를 거쳐 한 마리의 나비가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애벌레의 기둥이 하나 둘 무너지자 각각의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어 이룩하는 들판은 꽃들의 세상입니다.


3. 기어오를 것이 아니라 날아올라야 했어

감동과 함께 책을 덮으면서도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번번이 남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 책이 애벌레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의 전달서가 아닌 이상 필경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일진대, 그렇다면 여기서의 "나비"란 삶의 어떤 양태를 뜻하는 것일까?

적어도 "무엇"이, 예컨대 예술가라든가 종교적 수도자가 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예술가가 된다거나 종교의 수도자가 되어서야 참된 혁명일 수 없겠고, 또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가나 수도자의 세계에도-내 짧은 인생경험만으로 비추어 보아도-애벌레 기둥 같은 맹목의 무지는 엄연히 있으니까요.

삶의 태도!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똑같은 직업의 두 사람을 하나는 애벌레이게 만들고 하나는 나비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각 사람이 지상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작가 트리나의 잣대로 본다면, 인간은 크게 애벌레의 속성에 머물러 사는 유형과 나비의 속성으로 고양된 유형의 두 가지가 있달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럼 어떤 이가 애벌레이고 또 어떤 이가 나비겠습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우선 본능과도 같은 숙명적인 외로움이 있고, 그 외로움은 그로 하여금 타인에게 눈길을 주도록 만듭니다. 그 다음으로 인간의 내부에는 몸의 편안함 너머 무언가 다른 가치를 찾으려는 본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치 있는 것을 찾기 위한 인간의 다양한 시도나 그 결과물이 모두 아름답고 고귀하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요? 다시 책을 들추어 작자 트리나의 통찰을 함께 들여다 봅시다.

어느 하나 자기가 달려가는 이유를 알고 있지 않으면서 애벌레들은 이상하게도 늘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갈 곳을 알고 자기 행위의 가치를 아는 자가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의 삶이 풍요로 넘쳐 달리 허튼 시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의 바쁘다는 말은 실로 참담한 신음소리에 다름 아닙니다.
스스로를 항상 분주한 땀의 세계로 몰아가면서도 두뇌와 심장에는 아무런 꿈도 없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왜 그런 일을 하는가?" 물으면 그들은 그저 "남들이 하니까"하고 대답합니다. 꿈이 없는 땀방울은 악취를 풍기며 사람을 문명의 부품으로 전락시킬 따름입니다. 꿈이 없으니 그 인격체에 참되고 폭넓은 사랑이 깃들 리 없고, 그와 같은 부류가 이룬 공동체가 서로 밟고 밟히는 비정한 세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눈과 눈의 마주침으로 상징되는 영혼의 교유를 그들은 치명적인 악덕으로 생각합니다. 뒤늦게 꿈꾸며 살기를 희망한 대도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땀을 흘리기엔 너무 노쇠하고 사랑을 하기엔 이미 괴팍스러운 성품이 짓게 배어 있습니다. 땀방울과 사랑이 결핍된 꿈이란 한갓 관념일 따름입니다. "나비들만이 꼭대기를 보게 될 것이다." 빗나간 근면의 최후는 후회만을 남길 인생의 참담한 실패임을 트리나는 꼭대기에서 떨어진 애벌레들을 통해 생생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줄무늬 앞에는 나비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세 개의 과정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어 올라갈 것이 아니라 날아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날기 위해선 나비가 되어야 한다." 줄무늬의 마음속에 다음 단계를 향한 새로운 희망이 싹틉니다. 두 번째는 나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현재보다 훨씬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자라면, 그는 이미 보배롭고 존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비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고치를 만드는 일입니다. 용기와 기다림이 필요한 이 시기는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이전에 겪었던 막연한 외로움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독 속에서 그가 만나야 할 대상은 오직 그 자신뿐입니다.

아마도 지금의 독자와 나는 이 <고치를 만드는> 애벌레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쓰레기더미에 내 버리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제 그만 내 긴 이야기의 끝을 내야겠는데, 이 시점에서 독자인 당신께 한 마디 묻겠습니다.

“우리가 『나비』가 된다면 무엇이 지금과 가장 다르게 바뀌어 있을까요?”

제 생각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깊이 있고 포용력이 있는 『형제애의 소유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당신의 생애에 아름다운 혁명이 일어나길 빕니다. 한 사람의 향기가 바뀌어야 그에 따라 그만큼 세상의 향기도 바뀌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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