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탄생은 사람의 출생과 참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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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탄생은 사람의 출생과 참 많이 닮았다.

유용선 2 2539
詩의 탄생은 사람의 출생과 참 많이 닮았다.

                                유용선

1. 잉 태

먼저 못견디게 쓰고 싶어진다. 배설과 비슷하다. 쓰지 못하면 고통스럽다. 증상만으로 보면 성욕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성적 에너지를 작품에 쏟는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 마음이 충분히 고여 있으면 고여 있을수록 건강한 유전인자를 건네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쓰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쓰기에 착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은 대체로 시작메모에 충실하고 조급하지 않다.


2. 자궁 속에서

시심(詩心)은 창조적 인식으로 인해 깊어진다. 피상적 인식에 머물면 시는 변명이나 넋두리가 되어 정신의 자궁 속에서 계류 유산이 된다. 죽은 시를 시라고 우기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어쨌든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 내용에 가장 걸맞는 형식을 만날 때 가장 아름다워진다. 자유시는 정형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유시를 형식 자체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라 오해한다. 아니다. 자유시란 시의 형식을 그 내용과 서로 잘 어울리도록 자유롭게 창조해나가는 시를 뜻한다. 방종의 길로 가버린 시는 대중과 고급독자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 받는다.

시가 기형아(畸形兒)가 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건강한 시인이 건강한 시를 낳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건강한 시인도 때로 기형아를 낳는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훌륭한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엔 포우와 보들레르와 오스카 와일드와 휘트먼과 알렌 긴즈버그가 그랬고 우리나라에선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 최승호, 장정일 등이 그랬다. 그러나 일부러 그들 작품의 겉모습을 본받으려 하다가 낳지 않아도 될 기형아를 낳을 수 있으니 유의하여야 한다.


3. 출산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시쓰기 작업은 사실 본질적으로 퇴고(推敲)이다. 겉보기와 달리 무지 힘들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앞서 말한 자궁 속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을 경우엔 더욱 힘들다. 조산(早産)에는 제왕절개나 인큐베이터 신세와 같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출산 경험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좋다.
시가 태어난다. 그러나, 맙소사, 아직도 완성이 아니기 일쑤이다.


4. 출산후

낳느라 무척 큰 고생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시에 대해 간섭을 하거나 악평을 할 때 무척 감정이 상한다. 그러나 귀담아 들어둘 필요는 분명히 있다. 물론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라가다간 건강한 아기를 병약하고 소심하고 융통성 없게 키울 위험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평생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자기 자식에게 회초리를 댈 줄 모르는 부모는 나중에 그 자식에게 채찍을 맞는 법이다.


5. 주의할 점

내 눈에는 착하고 이뻐 보이는 자식도 남의 눈에는 불량하고 못난 놈으로 보일 수 있다. 발표된 시는 독자들 속에서 왜곡을 당하기도 하고 과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홀대를 당할 수도 있다.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발표된 작품에 대해선 시인 자신이 남 못지 않게 냉정해지는 편이 낫다. 자기가 지은 시에 자아도취(自我陶醉)된 시인은 어쩐지 추해 보인다.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대체로 시를 쓰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기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남의 시를 읽을 때는 먼저 그것을 쓴 사람의 시심과 인식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 보고 알아채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따뜻한 시읽기를 잘했던 분들로는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는 김현 선생과 구상 선생이, 활동하고 계신 분 가운데는 유종호, 김종해, 도종일, 김경민 등의 이름이 선뜻 떠오른다. 내가 과문한 탓에 많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나 더 많을 것이다.

그릇된 시읽기와 시쓰기는 시인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이 글의 끝에 경고해 둔다. 그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고 그 피해를 보상하는 보험이나 처방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시를 읽거나 씀으로써 시를 읽지 않고 쓰지 않는 사람보다 감동의 경험을 자주 하게 되기를 바란다. 아마도 이 글은 시 외의 문학장르에 적용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다른 예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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