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 김남열의 저들에 핀 들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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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운 김남열의 저들에 핀 들꽃처럼

하운 0 290
저들에 핀 들꽃처럼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고립감-

하운 김남열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며, 외로워하며, 고립감을 느끼면서 승화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홀로 세상에 왔듯이 홀로 세상을 떠난다.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하며 의연하게 떠나는 존재의 인간.
 그러면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갈망을 채워야 하는 존재의 인간.
 인간이란 존재는 생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살아가며, 무한한 갈등과 번민의 반복을 통해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저들에 홀로 핀 꽃들을 보아라. 그 꽃들은 사람들의 손길이 없어도 절로 피었다 인간들의 오감을 만족시켜주다가 말없이 서서히 소멸된다.
 단지, 인간만이 사람의 손길을 원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들꽃 한 송이

들판을 걷다
우연히 눈에 띈
들꽃 한 송이
 
무심코 가려다
가던 길 멈추고
그를 꺾으려하니

아무런 반항없이
환한 얼굴 미소보이며
고운 목을 내어주는 그녀
<시인 하운 김남열의 시 “꽃”중에서>
 
또, 인간이란 존재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며, 그 삶 자체의 부정과 긍정의 갈등적 대립 속에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삶 자체가 양극화 되어있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의 본연적 의지 자체가 애초에 선과 약의 양면적 양태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해 왔던 필연적이며 본질적인 요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삶 자체의 부정과 긍정적인 조화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완전한 인간 존재로 성숙해 가지만, 성장해 가는 과정 속에서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은 엄연히 구별되어진다.
말하자면 고독은 홀로설 수 있는 기쁨을 충족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반면 고립은 혼자 있는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소외된 모습이다.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은 모두 홀로 있음이다.
 고독과 외로움이 자기중심적이라고 본다면 고립은 타자 중심적인 면을 지닌다.
 고독과 외로움이 주관성을 가지는가하면 고립은 객관성을 지닌다.
 전자가 자기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라면, 후자는 타자에 의하여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서 고독과 외로움을 치열하게 느껴질 적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고립이다.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은 개인이 홀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무한한 즐거움 속에서  한편으로는 그 많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며, 외로움을 느끼며, 고립됨을 느낀다. 군중 속의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병리현상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떨어져 있을 때에 고독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애초에 선과 악의 의지를 동시에 물려받고 태어난다.
그리고 후천적 환경에 적응하기 나름에 따라 선의 의지가 강해지든자, 악의 의지가 강해진다. 선의 의지가 강해지면 그래도 사회는 살만한 사회라고 하며, 악의 의지가 강성해 질 때에는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선과 악의 의지 속에서 탄생한 부산물이 고독과 외로움과 고림됨의 감정이다.
 
시인 T. S. 엘리어트(1888~1965)는 텔레비전에 대해 “그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똑같은 농담을 보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고독을 느끼게 만드는 오락 매체이다”고 말했던 것처럼 후천적인 기계적인 오락매체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과 인간의 소통문화를 그 매체를 통하여 가능하게 하고, 인간과 인간이 직접 소통하게 되는 인간 자체의 어울림의 시간들을 빼앗아 버렸다.
 기계화에 의한 매스미디어화와 사회적 기계화가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 왔으며,  그 가속화가 여러 가지 사회적 병리현상을 발생하게 하고, 인간의 살아있는 감정마저 둔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기계화 현상으로 인해 인간은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이란 외톨이적 감정 모드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은 의지의 존재이며, 이성적 존재이면서 신앙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생각에 의하여 자신의 행동과 방향을 제시하며 나아간다. 그 의지와 이성과 신앙적 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축복이다.
 그 주어진 축복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소외되는 인간의 삶을 택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주어진 축복을 포기하고 사는 삶이며, 분명 인간 스스로의 존제 자체에 문제를 야기 시킨다.
 그 소외된 삶은 많은 사회의 문제를 발생 시키며, 사회의 질서마저 파괴하기까지 한다.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우울증이 걸리고, 고독과 외로움에 술 중독이 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폭력이 난무하고,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해하는 현상이 속출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인간은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의지, 이성, 신앙적 사고를 통하여 인간은 생각하며 느끼게 된다. 
 그 생각하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은 양면적 생각 속에서의 다른 한면이 수그러들고 피폐함을 느낄 적,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저속하게 만든다.
 이 같이 생각하기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올바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고립되기 시작, 고독과 외로움은 시작 되는 것이다.

허나, 무엇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각인해야 하는 사실은, 사람의 건강이 면역성을 잃게 되면 병원균이 침투하여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마찬가지이다. 축복받은 선물인 인간의 의지와 이성과 신앙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생각하기’를 통한 지속적인 사고가 느슨해지면 인간의 몸과 정신도 면역성을 상실하고 병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성에 친숙해지거나 생각하기를 통한 사회에서 자기성찰을 계속한다거나 웃음의 영양화를 통하여 축복받은 선물들을 강하게 하는 면역을 키우며 인간 내성을 강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원하지 않든, 원하든, 다양한 사회적 발전과 사람들과 괸계성 속에서 찿아오는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감.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것이기에 고통스럽고 두렵다고만 느끼지 말고, 내가 원해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즐기는 법도 스스로 채득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짐도 필요하다고 본다. 즉,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감은 즐길 수 없으면 두려운 사람의 것이 되고, 고독과 외로움과 고립감은 즐길 수 있으면 여유로운 사람의 것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직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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