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추천45]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낭송:김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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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개울 2018.01.25 09:34  
♣ 詩의 해설.

자유당 말기 사회상과 시인의 처신을 노래한 앙가지망(사회참여)적 저항시 작품이다.
1960년 3월13일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된 이른바 악명높은 3.15부정선거 직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이 그들의 집권연장을 위하여
경찰,공무원, 조직폭력배를 동원, 이승만 이기붕을 정, 부통령에 당선시켰으나
결국 4.19혁명을 촉발시켰던 선거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이 자행된 선거였다.

자유당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속에서 유치환의 시는,
사유(思惟)의 너울을 벗고 현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한다.
현실참여 사회참여 즉 앙가지망의 색채가 짙어지면서 불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태도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치환 시인은 당시 고등학교 교장직에 있었고
그는 대구 매일신문의 계륵(鷄肋)이라는 정기적인 칼럼에 기고하던 글에,
자유당 정권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썼기 때문에 정권의 압력에 의해 경남여고 교장직에서 떠나는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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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자유당 말기의 사회상과 시인의 처신을 노래한 앙가지망(사회참여)적 저항시 작품.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지조를 지키는 이의 긍지     
    * 제2연 - 부정한 사회현실 
    * 제3연 - 뜨거운 저항 의지 
    * 제4연 - 지조와 정의에 대한 결의
    * 제5연 - 현실의 고발 
    * 제6연 - 땅에 묻는 뜨거운 노래
3. 주제 : 사회 정의(正義)의 고취     
4. 소재 : 부정부패한 사회
5. 시어의 상징 의미 
    * 겨울 - 희망을 잃고 얼어붙은 시대(자유당 말기)
    * 뜨거운 노래 - 시인의 부정부패한 사회에 대한 분노 
    * 땅에 묻는다 - 진실을 담은 뜨거운 노래를 씨앗처럼 묻어 자라기를  기다리겠다.


♣유치환의 삶과 문학

청마(靑馬)와 이상(李箱)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시인이다.
청마는 건강한 몸을 지녀서 고래 술을 평생 마시고도 끄떡없었는데 이상(李箱)은 20대 중반에 얻은 폐결핵을 극복하지 못하고 28세로 요절했다.
이상(李箱)이 생(生)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하고 자기 모멸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을 때
청마는 생명의 서(書) 같은 시집을 내놓으며 삶의 정열에 들끓었다.

이상(李箱)이 인간의 삶 자체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의식적으로 ‘애욕의 진흙탕’에 뛰어든 반면
청마는 깃발, 바위 등을 발표하면서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를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다.
이렇게 다르면서도 둘은 친하게 지냈다. 이상(李箱)은 신상에 이상이나 변화가 있을 때는 꼭 청마에게 엽서를 띄워 알려주곤 했다.
이상(李箱)이 절망을 극복해 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이 청마였다.
청마는 그러므로 국내에서 이상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다.

이상(李箱)은 어느 날 일본으로 간다면서 느닷없이 청마를 찾아왔다.
둘은 항구의 싸구려 술집에서 엉망 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생명력이 충천한 시인 청마와 생명력을 찾아 얻어 보려는 이상(李箱)이 만난 술 자리이니 그 순간만은 의기투합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날밤, 지금은 불타고 없는 부산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여관이란 삼류 여인숙에서 지내고
이튿날 저녁 둘은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영원한 작별의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상(李箱)은 까마귀 같은 퀭한 눈에 커다랗게 입을 벌려 흥소했다.’
이것이 청마가 기록한 이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청마는 친계(親系)로부터는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고 모계(母系)로부터는 후덕한 덕성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청마의 성격 규정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에서 찾아져 왔고,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청마는 타고난 저항 정신을 피 속에 용해시켜 놓고 있었다.
그는 우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래고보 학적부를 보면 조선어, 영어, 한문은 늘 갑(甲;9점)인데 국어(일본어), 화학 등은 병(丙;4점)을 면치 못했다.
또 그는 결석을 잘 했다. 병이 났다고 결석계를 내고 학교엘 잘 빠졌는데 학적부에 기록된 ‘체격란’에는 항상 ‘갑(甲)’으로 되어 있다.
가기 싫은 학교를 꾀병 내고 안 갔음이 분명한데 그러고도 석차는 27명중 7등이었다.

청마는 학교하고는 연분이 적었던 모양으로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마음에 안 들어서 1학년도 다 못 채우고 걷어치웠다.
그러고는 다시는 학교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일본에 건너가 서 사진 학원에 들어가 사진 기술을 배운다.
사진관을 열어서 먹고 살 요량으로 한 것인데 사실상 그는 평양에서 그후 사진관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달만에 다 털어먹고 부산에 내려와 백화점 점원 노릇을 했다. 이것이 청마의 20대 모습이다.
30대 시절 청마는 만주 등지로 방황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외아들 ‘일향(日向)’을 잃게 된다.   
얼어붙은 땅에 외아들의 시신을 파묻고 마음이 여린 청마는 종래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도 나도 접어주지 않으려는 이 自虐의 길에
 내 열번 敗亡의 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悔悟의 앓음을 어디에 號泣할 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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