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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극장 길따라 생각따라 / 박얼서

박얼서 | 2019-02-25 14:56:15

조회수 : 1,200



인생극장 길따라 생각따라 / 박얼서​

<1>​

대학로의 밤은 옛 그때처럼 뜨거웠다
젊음의 열기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작은 오케스트라로 군림하던 저 통기타
발랄한 음률에 추억까지 펼쳐 놓는다​

내가~ 말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
내가~ 님 찾는~ 떠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소~​

발길을 옮긴 이곳의 밤은 더 이슥해져 있었다
거리가 온통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

좁은 골목길에 취객들을 비집으며
긴급출동 순찰차가 지나가고
누군가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응급차가 숨차게 달려오고​

내 발길이 야식집을 지나고, 노래방을 지나고
호객행위 아줌마를 뿌리치는 동안 ​
이내 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명에 아침에 햇살에 하늘에 구름까지도
세월의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다
아무런 고장 없이 작동 중이다 ​

아침 햇살이 눈총처럼 쏟아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숨어버린 간밤의 소란들
밤새껏 분주하던 삶의 그림자들
야식집도 호객행위도
감쪽 같이 사라졌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나 보다
'역사는 매일 반복된다고'​

<2>​

사람들은 일 찾아 인연 찾아 어디론가 바쁘고
나는 나를 찾아 나홀로 길을 걷는다​

낯선 동네 입구를 지나다가
문득 커피 자판기를 만나는 일이라든지
불쑥 사나운 개가 짖어대는 일이라든지
누가 나를 이유없이 훑어보고
째려보는 일들까지도​

길은 나에게 늘 친숙한 채 반기면서도
길은 나에게 늘 낯선 상대다​

<3>

걷다 보면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 당황할 때도 있지만​

걷다 보면
반가운 시골 오일장을 만날 때도 있다​

걷다 보면
절경의 송림정에 올라
몸을 풀어놓는 낮잠의 행운도 있고​

걷다 보면
얽히고설켰던 의문점 그 하나가
예상외로 쉽게 풀릴 때도 있다​

걷다 보면
수 년째 탈고를 미룬 채로
덮어두었던 시제(詩題) 그 한 줄의 꼬리가
번뜩 손에 잡히기도 한다​

<4>​

오지에 들어서면 작은 베낭은 오아시스다
생수와 음료 비스켓 초코렛 배터리까지
다 챙겼는데도 왠지 발길은 가볍다​

길 양편의 산맥들이 내 발길을 응원한다
강물이 세월과 함께 그 흐름을 지켜왔다면
산은 역시 높은 이상을 상징함이다​

드높은 기상으로
우뚝 솟은 뚝심 그대로
푸르름에서 엄동설산의 풍상까지도
아무 말없이 견뎌낸 세월둥이들
이게 다 우리의 강(江)이요
우리의 산(山)이요
우리의 길(道)이다​

오늘의 시간 위에 내 발길을 얹는다
바라보는 눈길도 함께 얹는다
기암의 준봉들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호연지기다​

<5>​

걷다 보면
낯선 풍경인데도 아련한 향수 한 점
어렴풋이 다가서기도 한다​

도로와 철길이
큰 강줄기를 가운데 품은 채
나란히 굽어 휘어지는 풍광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이런 명소야말로
위치와 각도만 잘 맞춰주면
강물과 철길에
도로와 내 발길까지 함께한
공존의 길이다​

<6>​

걷다 보면
잘 정돈된 가로수길, 꽃길도 있고
빈촌의 골목길, 돌담길도 만나고
오르막 산길도 가야 한다

지금 여기
논두렁 밭두렁 사이를 걷는
이런 길이야말로
외갓집 처마 끝의 빗물을 받아먹던
또랑길 두렁길이야말로
내겐 더 편안하면서도
발길마저 행복하다

길은 언제나 내게
많은 생각과 질문들을 던졌고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때마다 길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따져 물었고
많은 걸 가르쳤다​

<7>​

도보여행은 발품을 얻는 행복이다
뚜벅뚜벅 생각하며 뚜벅뚜벅 살피는 일이다
한걸음 한걸음 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어제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다

<8>​

걷다 보면
서운함이 곧 미안함이 되고​

걷다 보면
지독스럽게 막혔던 집착과 고집들이
시냇물처럼 온순해져
흘러내리기도 한다​

걷다 보면
천인단애의 벼랑 끝도 만나지만​

걷다 보면
전망좋은 호숫가 외진 벤치에 걸터앉아
고단함을 씻는 기쁨도 있다​

<9>

걷다 보면
어느덧 작은 포구가 있는
길 끝에 이르러
지난 추억을 회억해야 한다

인생길이란 처음 가보는 낯선 여행길이기에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여행길이기에​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오늘이라는 그 길 위에서

많은 발길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

나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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