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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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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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이재봉 1 144
저자 : 이재봉     시집명 : 익명의 시선
출판(발표)연도 : 2024     출판사 : 부크크
만년필 / 이재봉

내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는
손때가 오른 만년필이 꽂혀있다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신 만년필
무딘 펜촉을 꾹꾹 누르며 글을 쓰면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뒷동산에 올라 ‘메기의 추억’을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십 년 동안 왼쪽 가슴에 꽂혀
심장을 뛰게 했던 검정 만년필
이제는 닳아 없어질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의 반려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녹슨 촉을 삭삭거리며
아직 끝내지 못한 글을 쓰고 있다
1 Comments
이재봉 04.01 11:03  
2차 대전 당시 시베리아로 끌려갔던 독일군 포로 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전쟁터에 나올 때,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던 이유는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리라는 희망의 징표였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만년필은 언젠가는 아버지를 다시 보리라는 희망의 징표다. 그 희망의 표징에 마음을 담고 아버지가 그리울 땐 녹슨 촉을 삭삭거리며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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